HOME  >  미션라이프  >  역경의열매

[역경의 열매] 황성주 (16) 산을 옮기는 ‘겨자씨 믿음’… 심는 것은 우리의 몫
2002년 2만 달러에 매입해 개교한 쿠바 선교사관학교. 17년 만인 2019년 다시 방문한 황성주 회장(앞줄 왼쪽 두번째)과 전재덕 선교사(뒷줄 맨 왼쪽) 등 선교팀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02년에 쿠바에 다녀왔다. 쿠바는 공산권 국가라 교회 설립과 복음 전파의 자유가 없는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처소교회가 부흥하고 있었다. 고학력자와 다재다능한 사람들이 많아 ‘이 나라는 선교의 나라’라는 영적 통찰력을 가지게 됐다. 2만 달러로 집 한 채를 매입해 ‘쿠바와 중남미, 세계 선교를 위한 선교사관학교(DAAM)를 시작했다. 겨자씨만 한 믿음으로 선교...
입력:2022-04-12 14:10:01
[역경의 열매] 황성주 (15) 성경적 대안 교육의 훌륭한 역할모델 된 ‘꿈의 학교’
2018년 일본 나오시마에서 열린 꿈의학교 교사연수회에서 교사들이 꿈과 비전을 나누고 있다. 2000년이 저물어 가는 날 두 분의 학부모가 서울 강남구 논현동 사랑의 클리닉으로 나를 찾아왔다. 당시 아가피아에서 운영하던 꿈의학교를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공동체 리더들과 상의했더니 모두가 반대했다. 자산이 없고 빚만 남은 학교를 왜 인수하느냐는 것이었다. 내 경험상 일제히 반대하면 하나님의 뜻인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비전을 선포했다. 당시 내가 알고 있는 최고의 학습법인 ‘꿈의 학습’이라는 콘텐츠를 살리고 세계화하자며 차세대 대안 ...
입력:2022-04-11 14:05:03
[역경의 열매] 황성주 (14) 슈바이처 롤모델로 공부 집중… 두 달 만에 상위권 도약
황성주 회장의 고교 1학년 때 꿈은 목장주인이 되겠다는 것이었지만 양인옥 미술 선생님의 은퇴수업 시간에 감명을 받아 슈바이처 박사처럼 봉사하는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꾸게 됐다. 2015년 에티오피아에서 의료봉사를 하고 있는 황 회장. 쇼펜하우어는 두 가지의 불행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꿈을 이루지 못한 불행이고 다른 하나는 꿈을 이룬 불행이다. 전자는 결핍과 좌절이 계속되고, 후자는 오만과 권태의 시기가 오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꿈은 특별한 상황에서 꾸게 되거나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나의 어린 시절은 가난했고 상처가 많았다. 그래서 늘 ...
입력:2022-04-10 14:05:03
[역경의 열매] 황성주 (13) ‘자궁암 없음’ 통보받은 한 남성, 사기로 검찰 고발
2021년 4월 강원도 횡성 클럽캐슬에서 열린 사랑의 치유학교에서 암 환우들이 환담을 나누고 있다. 개원 당시 시작된 병원의 적자는 눈덩이처럼 늘어났다. 적자 해소 방안을 놓고 고민하던 나는 그만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평소 알고 지내던 분의 권유로 혈액 검진 사업을 시작했다. 검진팀이 각 직장을 방문해 직원들의 혈액을 채취해 수십 가지 항목을 체크하고 종합적으로 건강을 진단하는 것이다. 처음 몇 달 동안은 순풍에 돛을 단 듯 사업이 번창했다. 그런데 어느 날 검진팀이 내려가 있던 제주도에서 급한 연락이 왔다. 제주도에서 혈액을 채취했는데 의료법 ...
입력:2022-04-07 14:05:02
[역경의 열매] 황성주 (12)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러움 없는 제품 만들겠습니다”
황성주 회장이 2017년 킹덤 비즈니스를 지향하는 이롬 직원들과 12번째 의료봉사 지역인 아프리카 우간다로 떠나기 전 인천공항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랑의병원은 독일에서의 체험을 토대로 암환우들을 섬기는 비전에서 출발했는데 나는 이것을 ‘꿈의 재료’라고 불렀다. 암의 원인 중 70% 정도가 먹는 것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식이요법’은 정말 절박한 것이다. 암 환자의 고통을 생각해 식이요법을 연구하고 그 문제를 간과하지 않았기에 생식을 개발하며 ‘비즈니스’라는 새로운 세계에 진입할 수 있...
입력:2022-04-06 14:05:04
[역경의 열매] 황성주 (11) 새로운 패러다임 암 치료법 발견… 사랑의병원 설립
황성주 회장(왼쪽 네번째)이 2019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판교동 자택에서 현재 의대교수와 병·의원 원장으로 일하는 한림의대 아가페 제자들과 함께 식사기도 후 의료선교사로서 손가락 하트로 예수님의 사랑 실천을 다짐하고 있다. 당시 서울의대에서는 지방에서 개척하는 의과대학에 교수요원을 공급하고 양성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나는 바로 신청을 했다. 그래서 엄청난 지원을 받고 춘천에 있는 한림의대 교수요원이 됐다. 부임하자마자 한림대 아가페를 설립해 학생들을 전도했다. 날마다 캠퍼스에서 성경을 공부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선교농장 ...
입력:2022-04-05 14:05:03
[역경의 열매] 황성주 (10) 사역의 샘 근원이 된 빈민가와 무의촌 의료봉사
황성주 회장(앞줄 왼쪽 두번째)이 1996년 네팔의 도티로 의료봉사를 갔을 때 ‘네팔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강원희 장로(앞줄 왼쪽 세번째)와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한 팀으로 시작한 사랑의 봉사단은 1994년에는 4개 팀이 6개국을, 95년에는 8개 팀이 8개국, 96년에는 19개 팀이 13개국을 섬기게 됐다. 주님이 놀라운 특권을 허락하신 것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믿음으로만 시작했던 일이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이 일이 정말 소중한 사역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놀랍게도 사랑의봉사단으로 다녀온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갖게 됨은 물론...
입력:2022-04-04 14:05:03
[역경의 열매] 황성주 (9) ‘국제사랑의봉사단’ 이끌고 다시 찾은 찔마리 마을
황성주 회장 등 국제사랑의봉사단 1기 43명이 1993년 1월 방글라데시 찔마리 마을에서 주민들과 함께 전통놀이 깨금발 싸움을 하고 있다. 의과대학 교수 2년째인 1988년 1월 처음으로 해외에 나갔다. 병원을 경영하는 조은제 집사님이 개인 재산을 털어 만든 아시아구제기금의 지원을 받아 8명이 의료 봉사를 위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도시 방글라데시 찔마리를 방문했다. 찔마리는 방글라데시의 맨 북단에 있는 고장으로 자무나강을 끼고 있었다. 연례행사처럼 홍수가 찾아와 피해가 극심했다. 강 가운데에 있는 큰 섬에는 7000~8000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그런...
입력:2022-04-03 14:05:04
[역경의 열매] 황성주 (8) 생활고와 절박함에 시작된 저술 사역이 작가 만들어
치열한 글쓰기로 최근까지 ‘킹덤드림’(규장) 등 30여 권의 단행본을 출간한 황성주 회장은 10년 전 ‘선물’이라는 시집으로 문단에 데뷔한 이후 6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하다. ‘오아시스를 만나면 쉬었다 가라’는 말이 있다. ‘북악재’라고 불렀던 서울지구병원의 사택은 서울 성북동 꼭대기 외교관 촌에 위치해 있었다. 숲속이었고 산과 약수터가 5분 거리에 있어 몸과 마음의 건강을 지키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북악재로 이사 오기 전 사택이 다 차서 우리 가족은 따로 전세를 얻으라는 연락을 받았...
입력:2022-03-31 14:05:02
[역경의 열매] 황성주 (6) ‘살아있는 역할모델’과의 극적 만남은 ‘축복의 수혜’
2008년 여름 황성주 회장(맨 오른쪽)의 영적 멘토 중 한 분인 루이스 부시 박사(뒷줄 오른쪽 두번째)와 변혁미국(Transform USA) 핵심 리더들이 기도회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나는 매일 매일 좋은 만남을 달라고 절박한 기도를 드린다. 특히 자아도취에 빠지기 쉽고 죄성에 노출되기 쉬운 청년 시절, 1970~80년대 절묘한 시점에 허락하신 만남은 엄청난 축복의 수혜였다.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해 허우적대는 나에게 ‘살아있는 역할모델’이 되어주신 분들과의 극적인 만남과 이야기를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한국대학생선교회(CCC)에서는 김준곤 목사님 ...
입력:2022-03-29 14:10:02
[역경의 열매] 황성주 (7) “청와대로 보내주세요”… 간절한 기도 응답 주신 주님
강원도 원주 1군 사령부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할 때 황성주(앞줄 왼쪽 두 번째) 회장의 기도 제목은 청와대로 가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제가 가진 전공을 가장 잘 활용하여 조국과 사회의 발전을 위해 공헌하고 싶습니다. 이왕이면 저를 청와대로 보내주십시오.” 의대 교수를 2년 하고 군의관으로 입대해 강원도 원주 1군 사령부에 근무를 했다. 의대 교수 시절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개척한 교회를 섬겨야 하는 상황도 업무의 특성이 나에게 맞지 않았다. 그래서 2년 차에 반드시 서울로 발령을 받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인데 정원이 없었다. 그런데 ...
입력:2022-03-30 14:05:03
[역경의 열매] 황성주 (5) 3년 내 서울대 복음화 확신… 학우들 전도에 승부 걸어
40년 전 서울대 캠퍼스 복음화의 주역들. 왼쪽부터 이원재 조선대 교수, 홍종인 서울대 교수, 황성주 회장, 소영섭 전 연변과기대 교수. 1976년 10월 15일 서울대 개교 30주년 기념일이었다. 학생회관 뒤쪽 26동 대형 강의실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정신사의 강은 어디로 흐르는가?’라는 제목으로 김준곤 목사님의 신앙 강좌가 있었기 때문이다. 강연이 끝나고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서울대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총무 순장을 맡았던 나는 강단으로 뛰어올라가 ‘서울대 복음화 선언문’을 낭독했다. 그것은 당시 대표 순장이던 박...
입력:2022-03-28 14:10:05
[역경의 열매] 황성주 (4) 세계복음화 비전 영향받고 ‘평생 복음 전하는 의사 되게…’
대학생 시절 황성주 회장(오른쪽 첫번째)과 한국대학생선교회 형제들이 영적 스승인 김준곤 목사(맨 왼쪽)로부터 말씀을 듣고 민족복음화의 사명을 가슴에 아로새겼다. 김준곤 목사님과의 만남은 선물 그 자체였다. 특히 지상명령이라고 불리는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는 말씀에 근거한 세계복음화의 비전은 피 속을 흐르듯 내 일생일대의 신앙 철학이 됐다. 그래서 대학시절 미친 듯이 복음을 전했고, 주님 닮기를 열망하며 최고의 비전인 세계선교에 목숨 거는 ...
입력:2022-03-27 14:10:03
[역경의 열매] 황성주 (3) ‘고통의 심연’을 ‘아름다운 호수’로 만들어주신 하나님
황성주 회장 부부(앞줄)가 2002년 미국 워싱턴 한빛지구촌교회에서 목사 안수식 후 어머니(뒷줄 맨 왼쪽)를 모시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어머니, 이름을 부를수록 그 포근함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른다. 어머니는 할머니의 반대로 사범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평범한 주부로 아쉬운 일생을 사신 분이다. 아버지와의 불화로 난무하는 폭력과 폭언 등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사셨다. 처절한 고통을 때로는 인내로, 때로는 임기응변으로 극복하셨지만 가슴속에 맺힌 것이 무척 많으신 분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일이다. 그때는 방과 후에 학교 도서실에서 밤 11시30분까지 ...
입력:2022-03-24 14:05:03
[역경의 열매] 황성주 (2) 영성 학자들 만남 통해 ‘사랑의 혁명운동’ 영적 기초 쌓아
황성주 회장(뒷줄 오른쪽 세번째)이 2007년 8월 미국 콜로라도 록키마운틴공원에서 콜로라도 개척팀과 함께 킹덤드림을 꿈꾸며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50세에 미국 콜로라도를 간 것은 엄청난 도전이었다. 자연인의 삶을 누리는 계기가 되었다. 나보다 더 크고 위대한 것을 만나면 인생이 바뀐다. 이른바 ‘타자성’의 경험이다. 나를 객관화하고 상대화시켰다. 콜로라도의 대자연, 산과 들판, 강과 골짜기, 사시사철 계속되는 경이로움에 넋을 잃었다. 그리던 자연인의 삶이 시작되었다. 창조신앙의 본질을 알게 되었다. 이때 비로소 창조신앙과 구속신앙...
입력:2022-03-23 14:10:02
[역경의 열매] 황성주 (1) 만남은 축복, 변화의 시작… 하나님은 내 삶의 모든 것
황성주 회장이 2022년 새해를 맞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삼평동 사랑의병원 진료실 앞에서 ‘사랑의 혁명을 꿈꾸다’라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Kingdom Dream)을 제시하고 있다. 만남은 축복이요, 거룩한 변화의 시작이다. 19세에 만난 김준곤 목사님은 내 삶의 한 복판에 영성의 폭탄을 터뜨린 분이다. 이 분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만남의 축제가 인생을 송두리째 변화시켰다. 진정한 나를 찾았고 이웃을 재발견했다. 민족을 만나고 세계를 만났다. 그토록 찾아 헤맸던 진리를 알고 복음을 미친 듯이 전했다. ...
입력:2022-03-22 14:10:01
[역경의 열매] 이건숙 (30·끝) 주님이 명한 내 소명은 성경과 문학 사이 다리 놓는 것
소설가 이건숙(앞줄 오른쪽 세 번째) 사모가 2018년 크리스천문학나무에서 등단한 작가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다음 시는 내 아들이 아버지 신성종 목사를 어떻게 보았는지 쓴 글이다. 제목은 ‘아버지가 숨겨놓은 리어카’이다. ‘내 앞에서는/ 항상 새 양복을 입으시던 아버지/ 용돈을 왜 이리 많이 주시나/ 아버지께 물어도 대답이 없으시네./ “아버지 부자 상자를 가지셨지요?”/ 말없이 헤어진 아버지를/ 어느 날 길에서 보았네./ 흙 묻은 헌 옷차림으로/ 붕어빵 장사를 하시는 아버지/ 내 앞에서 나쁜 사람이 리어카를 엎어...
입력:2022-03-21 14:05:04
[역경의 열매] 이건숙 (29) 기독 작가의 글은 생명의 양식… 성도들 삶 문학으로 승화
소설가 이건숙(앞줄 왼쪽) 사모가 1998년 남편 신성종 목사, 두 아들, 며느리 및 손주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다. 한 국가처럼 세상 모든 층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영아 거지 사기꾼 부자 낙오자 정치가 교수 의사 등 모든 층의 사람들이 모인 나라이다. 낙심하고 가난한 병든 사람들을 사랑으로 돌봐야 하고, 거드름을 피우는 가진 자들을 이끌고 천국을 향해 대행진을 하는 곳이다. 사모의 자리는 그 나라의 퍼스트레이디이지만, 존경을 받고 위함을 받는 자리가 아니다. 오히려 맨 밑바닥의 사람들을 섬기며 맨 위의 귀족들...
입력:2022-03-20 14:10:01
[역경의 열매] 이건숙 (28) 부족한 재정 메우려 몸 혹사… 새벽 기도회 도중 쓰러져
소설가 이건숙(왼쪽 두번째) 사모가 남편 신성종(왼쪽 세번째) 목사와 함께 2004년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방문해 이영훈(오른쪽 두번째) 목사와 환담하고 있다. 몸을 짓누르는 무게에 눌려 간신히 눈을 뜨니 남편 신성종 목사가 내 옆에 엎드려 있었다. 한의사도 다녀갔는지 목 뒤에 자잘한 일회용 침이 꽂혀 있었다. 온몸에 생명구조 장치가 주렁주렁 달렸고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의식이 돌아와 눈을 뜬 나를 보더니 남편은 흐느꼈다. “살아났군.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셨어. 이제 우리 고국으로 돌아가서 치료를 받자. 온전히 당신을 위해서 내가 살 거...
입력:2022-03-17 14:05:03
[역경의 열매] 이건숙 (27) 목회 현장서 얻은 소중한 글감, 소설로 다시 태어나
소설가 이건숙(왼쪽 두 번째) 사모가 2000년 남편 신성종(왼쪽) 목사 및 친정어머니(왼쪽 세 번째)와 미국 LA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남편과 목회하는 동안 기독교 전래 100여년 역사에 켜켜이 스며있는 인물들이 소설 글감으로 넘쳐났다. 목회 현장에서 교인들이 전해주는 선조들의 신앙 이야기를 짧은 스마트 소설 형식으로 월간 새가정에 ‘민초들의 이야기’ 제목으로 연재했다. 세월 속에 살아오고 있는 이들의 믿음은 반드시 남겨야 할 글감들이었다. 나는 심방을 가면 그 집안의 선조들 이야기를 들으려고 귀를 세웠다. 그들은 신이 나서 풀어놓는 통...
입력:2022-03-16 14:05:04
[역경의 열매] 이건숙 (26) 이제 겨우 살만한데… 교수직 버리고 목회 결심한 남편
소설가 이건숙(가운데) 사모가 2004년 남편 신성종(오른쪽) 목사와 교회 수련회에서 피에로와 함께 서 있다. 남편 신성종 목사는 늦은 나이에 안수를 받고 충현교회 대학부를 인도하다가 사임했다. 명지대 교수 겸 대학교회 목회를 했다. 두 가지 사역 모두 전임이라 드디어 강단 위에서 쓰러지는 사건이 나고 하나님은 그제야 귀국할 적에 원했던 그 신학교로 보냈다. 거기서 부교수를 거처 정교수가 되고 대학원장이 되었다. 시동생들도 자립하고 이제 시부모님만 남아 숨통이 트이는데 남편은 갑자기 학교를 버리고 목회를 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나도 어느 정도 안...
입력:2022-03-15 14:05:03
[역경의 열매] 이건숙 (25) 돈 욕심에 “우리 한국 가지 말고 장사나 해요”
소설가 이건숙 사모가 1989년 대전중앙교회에서 목회하던 남편 신성종 목사와 나란히 서 있다. 우리 부부가 가발가게를 시작한 2년간은 초창기 개척 시기라 호황이었다. 남편 신성종 목사는 돈이 들어오니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좋은 타자기도 사고 책도 마음대로 사서 공부하는 속도가 빨라 급 스피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가발가게를 하는 동안 내겐 엄청난 유혹이 다가왔다. 세상에! 돈이 술술 들어오니 돈으로 무엇이나 할 수 있었다. “여보! 우리 교수니 목사니 신학자니 다 팽개치고 장사를 합시다. 돈이 이렇게 술술 들어오는데 뭣 하려...
입력:2022-03-14 14:05:04
[역경의 열매] 이건숙 (24) 가게 데리고 나간 아이들 거리에서 “Come in, Try the wig”
소설가 이건숙 사모가 1988년 남편 신성종 목사, 두 아들과 가족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우리 부부는 겁도 없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물어물어 선반을 샀다. 하나씩 둘러메고 와서 사방에 선반을 매달고는 가발을 진열했다. 필라델피아 남쪽에 처음 들어선 가발 가게였다. 금요일 오후와 토요일에 손님이 밀려와서 선반에 진열해놓은 가발이 하나도 남지를 않았다. 몽땅 팔려 돈이 소쿠리에 수북했다. 주말에 팔리는 것이 그 주간의 80%를 차지했다. 주중에는 아이 둘을 데리고 기차와 버스를 번갈아 갈아타고 가발가게에 와서 장사했다. 손님이 적어 아이들을 돌볼 ...
입력:2022-03-13 14:05:05
[역경의 열매] 이건숙 (23) 가발 사업 시작한 지인 “돈 많이 줄 테니 도와줘”
소설가 이건숙 사모가 미국 유학 중이던 1973년 필라델피아의 가발가게에서 선반을 배경으로 웃고 있다. 아이 둘을 거느린 가난한 유학생 부부는 그야말로 사면이 꽉 막힌 상태였다. 그냥 귀국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여 열린 문을 찾아야 하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게 됐다. 그 시기에 뜬금없이 워킹 블라인드에서 함께 일하며 내가 전도해 예수를 믿게 된 P여사가 전화했다. “밤에 양로원에서 일하니 건강도 버리고, 돈도 밑바닥 수당을 받으니 어떻게 살아. 내가 은혜를 입었으니 갚아야지. 가발 가게를 열었는데 손이 모자라니 가장 바쁜 주말에만...
입력:2022-03-10 14:10:02
[역경의 열매] 이건숙 (22) 낮엔 육아와 교회 일, 밤엔 양로원서 간호 보조로
소설가 이건숙(왼쪽) 사모가 198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에서 단편 ‘양로원’으로 소설부문 상을 수상하고 있다. 둘째 아들을 낳고는 워킹 블라인드에서 시각 장애인들과 일할 수가 없어 나는 남편 신성종 목사와 의논해 한국에 두고 온 큰아들을 데려오기로 했다. 연년생의 두 아들을 낮에는 내가 교회 일을 하면서 돌보고, 학교에서 돌아온 남편이 밤에 교회 일을 하면서 아이들을 돌보는 시간에는 내가 또 밤에만 일하는 직업을 구하기로 했다. 그 방법이 아니면 우리는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신문 구인광고를 보니 밤에만 일할 수 있는 곳은 양...
입력:2022-03-09 14:05:03
1 2 3 4 5 6 7 8 9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