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미·서리태 등 곡물류는 병에 채소·과일은 바구니로 구매
비닐·플라스틱 포장 사용 안해… 빨대도 스테인리스 제품
일부 생협서도 포장 줄이기… ‘분리수거 대란’ 이후 대안 부상
서울 성동구에 위치한 카페 겸 식료품점 ‘더피커’에 들어선 사람들은 마치 깔끔하게 꾸며진 곡물상회에 찾아온 느낌을 받는다. 19일 이곳을 찾은 기자에게도 쌀 현미 병아리콩 오트밀 서리태 흑미가 채워진 투명한 병들이 먼저 눈에 띄었다. 매장 왼편에 늘어선 바구니에는 유기농 감자와 무농약 양파, 사과 같은 채소와 과일이 막 수확한 듯한 모습으로 담겨 있었다. 비닐이나 플라스틱병 단위로 작게 포장된 제품은 없었다. 이곳의 목표는 ‘포장쓰레기 제로(waste zero)’다.
재활용 쓰레기 분리수거 대란 이후 더피커와 같은 무포장 식료품점이 대안으로 부각되고 있다. 분리수거 대란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늘어나는 쓰레기다. 과도한 포장, 일회용품 사용이 계속되면 아무리 쓰레기를 수출하고 파묻고 태워도 문제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환경부가 이달 말 일회용 컵에 보증금을 붙이는 등 쓰레기 발생을 억제하는 정책을 준비 중인 것도 이 때문이다.
더피커에서는 과일이나 채소, 곡물 등을 원하는 만큼 덜어서 비닐봉지 대신 에코백 같은 장바구니나 유리병에 담아 간다. 더피커 송수니 매니저는 “쓰레기 대란 이후 손님이 많이 늘었다”고 말했다. 그래도 아직까지 에코백이나 병을 준비해오는 사람은 10명 중 2∼3명 정도라고 한다. 이날 오후 바나나를 구매한 성수동 주민 박성희(38·여)씨는 “포장을 줄이는 게 지구와 환경을 위해 중요하지만 나에게도 도움이 된다”며 “쓰레기를 챙겨놨다가 요일을 맞춰 버리는 게 일이지 않냐”고 했다.
더피커는 국내에서 사실상 유일한 쓰레기 제로 식료품점이다. 이곳은 식자재와 함께 간단한 샌드위치, 음료도 판매한다. 실험적인 시도라 재고가 쌓일 수 있기 때문에 레스토랑도 같이 운영하고 있다. 이때도 일회용품은 쓰지 않는다. 세제나 샴푸 등의 공산품도 같은 방식으로 판매하는 방안을 고려했지만 현행법의 규제 때문에 구상에 그쳤다고 한다.
호주나 독일에서는 몇 년 전부터 이런 식료품점이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9월 기자가 방문한 호주 멜버른의 지구의벗 생활협동조합 매장에서는 간장 식용유 곡물은 물론 세제까지도 포장 없이 팔고 있었다. 간장을 사러온 손님은 자연스럽게 가방에서 유리병을 꺼내 원하는 만큼 담은 후 계산했다.
일회용품, 특히 불필요한 포장재를 줄이기 위한 노력은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그린피스에 따르면 프랑스는 2020년부터는 일회용 플라스틱과 그릇을 팔 수 없다. 모로코도 지난해 7월 비닐봉투의 생산과 수입, 판매, 유통을 모두 규제하기 시작했다.
일회용 포장재가 급증한 이유는 대형유통업체의 성장과 관련이 있다. 매장규모가 클수록 위생이나 관리상 문제 때문에 포장을 꼼꼼하게 한다. 친환경을 내세우는 생협도 마찬가지다. 대신 친환경 비닐이나 종이를 쓰고 되도록 장바구니를 권한다. 한 친환경마켓 관계자는 “2∼3년 전쯤 유럽과 비슷하게 병에 담아가게 하는 방안을 논의했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워 진행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린피스 박샘은 캠페이너는 “사용자의 편리함 때문에 플라스틱과 일회용품을 사용한다고 하지만 실제 사용자들은 플라스틱을 사용하지 않을 선택권이 없는 상태”라고 지적했다.
더피커에도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 산지에서부터 포장을 해서 판매하는 경우 어쩔 수 없이 쓰레기가 발생한다. 가게 규모가 작아서 품목을 늘리기 부담스러운 점도 있다. 송 매니저는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다는 건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 다만 귀찮은 것”이라면서 “‘귀차니즘’을 조금 내려놓고 하나씩 실천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임주언 조민아 기자 eon@kmib.co.kr
사진=김지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