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인천아시안게임 복싱 은메달리스트 김형규는 지난 4년간 새벽부터 저녁까지 구슬땀을 흘리며 훈련에 매진했다. 지난해 말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복싱 대표 선발전도 가볍게 통과했다. 그러나 올해 2월 인도네시아 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INASGOC)가 그가 뛰는 -91㎏(91㎏ 이하)을 포함한 중량급을 대회 체급에서 대거 제외하며 김형규는 자카르타에 못 가게 됐다. 국제 종합대회에서 남자 중량급이 빠진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일방적인 통보에 대한복싱협회는 조직위 및 국제복싱연맹에 항의했고, 국내 복싱인들은 서명운동까지 나섰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는 지난 5월까지 국가대표로 함께 훈련했지만 끝내 대회 참가는 무산됐다. 김형규는 “아시안게임에 나가는 복싱 선·후배들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경기 날짜를 올릴 때면 내가 정말로 같이 가지 못한다는 게 실감 난다. 경기에 나설 기회조차 없어져 막막하다”고 털어놓았다.
변덕스러운 체급·종목 조정
조직위의 갑작스러운 체급 조정과 변경으로 아시안게임에 나가지 못하는 복싱 국가대표 선수는 김형규를 포함해 4명이다. 지난해 9월까지만 해도 조직위는 남자 8체급, 여자 5체급이 예정돼 있다고 공문을 보내왔다. 그런데 올해 2월 갑작스레 남자 7체급, 여자 3체급까지 가능하다고 통보한 것이다. 전체 체급이 세 개나 줄었을 뿐 아니라 출전 가능 체급도 조정돼 남자·여자 중량급이 모두 제외됐다. 해당 체급의 선수들은 억울함을 감출 수 없었다. 최희국 복싱협회 사무처장은 체급이 변경된 이유에 대해 “인도네시아가 중량급에서 불리해서인지, 행정 경험이 부족한 탓인지 모르겠다”며 “개최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렇게 오락가락해도 되느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반면 무도 종목은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기존의 우슈 외에 펜칵실랏, 쿠라쉬, 주짓수, 삼보 세부종목 4개가 새로 추가됐다. 무도에만 49개의 금메달이 걸려있어 수영(55개) 다음으로 많다. 특히 동남아 고유 무술인 펜칵실랏에는 금메달이 무려 16개나 배정됐다. 자국에 유리한 종목을 대폭 늘리기 위한 의도로 풀이된다.
사이클의 경우 대회까지 두 달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갑자기 세부종목이 추가됐다. 대한체육회에 따르면 엔트리 마감날인 6월 30일 조직위로부터 ‘메디슨(2명의 선수가 50㎞를 교대하며 주파하는 경기)’이 세부종목으로 추가됐으니 선수를 등록하라는 연락이 왔다. 체육회와 대한자전거연맹은 부랴부랴 다른 종목의 사이클 선수들을 대신 출전 선수로 등록했다. 자전거연맹 관계자는 “갑작스러운 종목 추가는 일반 국제대회에서도 보기 힘든 굉장히 드문 일이라 당황했다”고 말했다.
고무줄처럼 제멋대로 체급과 종목을 조정하는 것은 규정과도 맞지 않다. 조직위의 상위 기구로 아시안게임을 주관하는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의 규정 71조는 “OCA는 아시안게임이 개최되기 최소 2년 전에 각 종목의 세부 구성을 정해야 한다”라고 명시한다. 원칙이 유명무실해지며 선수들만 피해를 입고 있다.
미정·변경·재추첨… 엉망진창인 스포츠 행정
종목뿐 아니라 경기 대진과 일정도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 아시안게임 축구 조 편성은 주최 측의 실수로 혼선을 겪었다. 아시아축구연맹(AFC)은 지난 5일 조 추첨을 진행한 후 아랍에미리트(UAE)와 팔레스타인이 빠져 이를 무효로 하고 다시 한다고 공지했다. 이후 또 말을 번복하며 원래의 조 편성을 인정하되 2개국을 추가해 추첨하겠다고 밝혔다. 결국 AFC는 25일 추가 조 추첨을 진행했다.
2차 조 추첨 결과 한국이 속한 E조에 UAE가 추가됐다. 참가팀이 하나 늘어남에 따라 경기 일정도 훨씬 빡빡해졌다. 대표팀은 국내 평가전을 취소하고 출국 날짜를 앞당기는 등 기존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혼란을 겪은 종목은 남자축구뿐이 아니다. 카누, 하키, 패러글라이딩, 조정, 스케이트보드 등 7개 종목의 일정은 여전히 정해지지 않았다. 개막이 한 달도 남지 않았지만 경기 일정과 장소가 변경될 수 있는 상황이다. 남자농구 대표팀은 본래 다음 달 19일부터 예선을 치를 예정이었지만, 일정이 일방적으로 바뀌며 14일 인도네시아와 A조 예선 첫 경기를 치른다. 경기 날짜에 맞춰 현지로 이동하고 컨디션을 끌어올려야 하는 선수단은 곤혹스럽다. 체육회는 경기 일정·대진이 확정되지 않아 아시안게임 티켓 구매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열악한 교통 및 경기장 인프라
대회를 치를 경기장이나 교통수단 등 인프라도 열악하다. 다양한 40개 종목의 경기가 수월하게 치러질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다.
자카르타 케마요란에 위치한 선수촌에서 메인 스타디움인 겔로라 붕 카르노(GBK)까지는 50분이 걸린다. 이 또한 차가 막히지 않았을 때를 가정한 소요시간이다. 교통 체증이라도 발생하면 넉넉잡아 1시간30분은 잡아야 한다. 선수촌의 주차 공간도 좁아 여러 국가의 선수단이 동시에 이동 버스에 승하차하기도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6월 자카르타 현장 답사를 간 체육회 관계자에 따르면 몇몇 경기장은 미처 완공되지도 않았다. 일본, 중국 등이 포함된 A조 예선 경기가 열리는 라와망운 야구장은 공사 진행률이 크게 낮은 것으로 알려졌다. 체육회 관계자는 “그라운드도 고르지 않았고 어디부터가 관중석인지도 구분하기도 어려웠다”고 했다.
부족한 행정력과 짧은 준비 기간이 문제
체육회와 유관 협회는 조직위가 대회 준비에 필요한 안내사항들을 제때 공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이 크다. 협회가 경기와 관련해 문의 메일을 보내도 조직위의 답신이 오지 않는 것은 예삿일이다. 체육회 관계자는 “조직위가 사전에 제시한 업무 타임라인이 계속해서 늦춰지고 있다. 일정이 많이 미뤄지다 보니 제 할 일을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상식 밖의 실수와 늦은 일처리의 원인으로는 인도네시아의 미숙한 행정이 지적된다. 신문선 명지대 교수는 “동남아의 경우 스포츠 행정이 양극화돼있다”며 “영국의 지배를 받았던 홍콩이나 말레이시아의 경우 상당히 선진적이지만, 인도네시아의 경우 크게 뒤처져 있다”고 설명했다.
인도네시아가 대회를 성급하게 유치하며 준비 기간이 짧았던 문제도 있다. 당초 이번 아시안게임은 2019년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하지만 베트남 정부는 경제난 등을 이유로 2014년 4월 개최권을 포기했고, 인도네시아가 유일하게 유치 의사를 밝히며 뒤늦게 개최권을 따냈다. 여기에 인도네시아 정부는 2019년 열리는 대통령 선거를 이유로 한 해 일찍 당겨 개막하기로 결정했다. 기간이 짧으니 준비도 미흡할 수밖에 없었다.
월드컵이나 올림픽에 비해 떨어지는 아시안게임의 위상을 고려했을 때 불편해도 어쩔 수 없다는 의견도 있다. 신 교수는 “한국은 스포츠 강국인 만큼 어려운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방극렬 기자 extrem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