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 준비생 한모(26)씨는 지난달 온라인 기록 삭제 전문업체를 찾았다. 대학생 시절 대기업의 ‘갑질’을 비판하는 시위에 참여했다가 찍힌 동영상을 인터넷 곳곳에서 발견한 뒤였다. 한씨는 “기업 인사팀에서 지원자의 인성 파악을 명목으로 SNS 등을 검색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업체에 논란이 될 만한 기록을 모두 삭제해 달라고 의뢰했다”고 말했다.
온라인 기록 삭제를 전문으로 하는 일명 ‘디지털 장의사’를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 진로에 방해가 될 수 있는 기록물, 헤어진 애인과 촬영했던 동영상이나 온라인 메신저에서 나눴던 비밀스러운 대화 등을 지우려는 이들까지 각양각색이다. 최근에는 몰래카메라나 웹캠 등을 통한 음란 동영상, 사진 등의 유출이 더 빈번해지면서 이용자 수가 크게 늘고 있다는 게 관련 업체의 설명이다.
2005년 미국에서 시작된 디지털 장의사는 본래 사망한 사람의 온라인 유산을 정리해주는 일이 주요 업무였다. 사망자의 개인정보를 유족에게서 넘겨받아 생전에 사용했던 SNS 계정 및 사진, 게시 글, 카드번호, 공인인증서, 보안카드 등을 삭제하는 일을 했다.
국내에서는 리벤지 포르노 등 불법으로 유포된 촬영물 및 특정 개인에 대한 악의적 게시물과 댓글 등을 삭제해주는 역할로 확대됐다. 2008년 연예인을 향한 악성 댓글을 지워주는 업체가 등장한 이후 디지털 장의 업체가 점점 더 늘었다. 현재 약 20곳이 활동 중이다.
디지털 장의사는 보통 온라인 평판관리사 및 인터넷정보처리사 자격증을 갖고 있다. 지난해에는 방송통신위원회와 한국평생교육진흥협회가 주관하는 ‘디지털 장의사 민간자격증’까지 등장하며 전문직으로 인정받는 분위기가 됐다. 한국고용정보원은 지난해 향후 5년 내 급성장할 유망 직종 중 하나로 디지털 장의사를 선정했다.
디지털 장의사는 고객과의 상담을 통해 일을 시작한다. 상담은 철저한 비밀유지를 위해 홈페이지 비밀게시판을 통하거나 전화통화로 이뤄진다. 고객이 의뢰하기로 마음을 굳히면 계약서를 작성한다. 이때 의뢰인은 삭제하고 싶은 내용을 더 상세하게 명시해야 한다.
이후 디지털 장의사는 국내외 포털 사이트 등에서 특정 게시물을 검색한 뒤 사이트 운영자에게 이를 지워 달라고 요청한다. 해당 사이트 운영자가 촬영물 삭제 요청을 거부할 경우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심의를 요청해 사이트를 폐쇄하거나 검색 노출에 제한을 건다.
디지털 장의사 강모(35)씨는 24일 “일반적으로 국내 포털 사이트에서 30건을 삭제하는 데 평균 1시간가량 걸리며 유튜브 페이스북 트위터 텀블러 등 해외 사이트는 빠르면 2∼3일, 때로는 훨씬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업자들은 해외 사이트라도 불법 게시물인 경우에는 비교적 명확하게 삭제를 요청할 수 있지만 불법성 여부를 입증하기 힘든 경우에는 삭제가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강씨는 “게시물 삭제의 필요성을 해당 국가의 언어로 사이트 운영자에게 일일이 소명해야 해 다소 난감할 때가 있다”고 말했다. 삭제가 완료되면 처리 과정과 결과물을 의뢰인에게 이메일로 알려주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비용은 업체마다 다르지만 통상 국내 사이트의 경우 100개 이하 게시물은 평균 50만원부터 시작한다. 해외 사이트로 유출된 동영상을 삭제해야 하는 경우 300만원 이상이 든다. 평판을 중요하게 여기는 연예인이나 기업 등이 고객일 경우 일반인보다 훨씬 많은 금액을 지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3년부터 디지털 장의업체를 운영 중인 송모(45)씨는 “4∼5년 전만 해도 연예인이나 스포츠스타 등이 암암리에 삭제 의뢰를 해왔는데 요즘은 전체 고객의 절반 이상이 일반인”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디지털 장의업체 운영자 이모(44)씨는 “대부분 디지털 장의사는 빠른 시간 안에 고객의 의뢰를 처리해야 해 밤낮없이 데이터를 찾고 삭제 업무를 하고 있다”며 “인건비 등 업체 운영에 지출되는 금액이 많아 이용료가 높다”고 말했다.
디지털 장의업체가 증가하면서 부작용도 발생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디지털 장의사가 여러 사람이 알 필요가 있는 특정인이나 업체의 나쁜 과거를 세탁하는 데 악용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디지털 장의업체는 의뢰를 접수할지 말지를 윤리규정 없이 자의적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의료사고를 낸 병원의 의뢰를 받아 온라인상에 퍼진 의료사고 기록을 모두 삭제한다면 공공의 이익에 위배될 수 있다. 실제 2014년 3월 서울의 한 병원은 과거 발생한 의료사고와 관련해 포털 사이트에 떠 있는 연관 검색어를 지워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심의를 맡은 한국인터넷자율정책기구(KISO)는 삭제를 거부했다.
디지털 장의사가 음란사이트와 결탁한 사례도 있었다. 지난 6월 부산에서는 디지털 장의사 A씨가 불법 유출된 사진 삭제 업무를 독점하게 해 달라며 음란사이트 운영자 B씨에게 600만원을 건넨 사실이 밝혀져 경찰 수사를 받았다. B씨는 피해자들이 삭제를 요청하면 A씨를 소개해 줬고 A씨는 돈을 받고 영상을 삭제해 줬다.
고객의 절박함을 이용해 갑질하는 일부 디지털 장의사들에 대한 관리·감독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불법 촬영물 유출 피해자들은 주로 영상 촬영자나 유포자를 경찰에 신고하면서 삭제를 요청한다. 하지만 방심위 심의를 거쳐 유포된 사진이나 영상이 삭제되는 데까지 짧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때문에 디지털 장의사를 찾아가 거액을 지불하며 의뢰하지만 제대로 삭제가 되지 않고 업자는 책임을 회피하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김모씨는 올해 초 결혼을 앞두고 디지털 장의업체에 전 남자친구와의 수위 높은 애정행각이 담긴 동영상을 삭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유출된 동영상은 음란물 사이트 곳곳에 퍼진 상황이었다. 200만원을 지불했지만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해당 디지털 장의사는 “바쁘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며 일 처리를 미뤘다. “그러게 왜 그런 동영상을 찍었느냐”는 핀잔도 줬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일부 업자들은 완전한 삭제가 어려운 상황임을 알면서도 피해자에게 확실한 삭제를 약속하며 거액의 돈을 챙기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찾아온 이들을 농락하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온라인 게시물은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쉽게 퍼질 수 있는 만큼 신중하게 작성할 필요가 있다”며 “몰카 등 불법 촬영물 유포의 경우에는 엄격한 단속과 예방 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경찰은 불법 촬영물 유통구조를 원천 차단하기 위해 사이버성폭력 사범을 특별 단속하는 중이다. 특별수사단을 꾸려 11월 20일까지 불법 촬영물이 유통되는 웹하드, 음란사이트, 커뮤니티 사이트, 이들과 유착한 헤비 업로더(불법 촬영물 등을 대량으로 올리는 사람), 디지털 장의사 등을 집중 단속할 계획이다.
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