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월 1일 서울 강남구의 한 스튜디오에 20∼40대 여성 6명이 모였다. 이들은 책 한 권, 노트 한 권, 펜 한 자루씩을 들고 자리에 빙 둘러 앉았다. ‘책 잡힌 날’이라는 글쓰기 모임을 함께하기 위해 처음 만난 사람들이었다. 어색하게 서로 눈인사를 나눈 뒤 이 모임을 이끄는 ‘문장수집생활’의 저자 이유미(38) 작가가 첫마디를 뗐다. “이 모임에 어떻게 오시게 되셨나요.”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등단을 하려는 작가 지망생일 수도 있고, 책 한 권 내는 게 꿈인 사람일 수도 있다. 예전엔 그랬다. 책을 내고, 작가가 되겠다는 목적의식을 갖고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을 실현해 내고자 했다. 문학을 공부하고 전문적인 수업을 듣는 식으로 방법을 찾아나갔다.
하지만 요즘은 달라졌다. 블로그를 잘 만들기 위해, 보고서를 잘 쓰기 위해, 페이스북에 내 생각을 잘 정리하고 싶어서, 언젠가는 자비 출판으로라도 나를 위한 나만의 책을 만들어 보고 싶어서 ‘글쓰기’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거창한 목표를 둔 글쓰기가 아니라 ‘오늘 나의 행복’을 위한 글쓰기를 하려는 트렌드가 생겨난 것이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소확행)을 추구하는 시대 분위기와도 맥락을 같이한다. 그래서 대학이나 출판사 등에서 주관하는 문학 아카데미 등의 강좌를 듣기보다 소규모 글쓰기 모임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소설가, 출판사 편집자, 에세이스트 등 출판계의 일을 잘 알고 글을 써 본 사람들이 만든 ‘작지만 실한’ 글쓰기 모임이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다.
금융권에서 10년 넘게 일하다 퇴사하고 여행 관련 일을 새롭게 준비하고 있는 김윤정(39)씨가 ‘책 잡힌 날’ 모임에 참여하게 된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렇다. ‘어떻게 오게 됐느냐’는 이 작가의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친구들과 대화도 잘하고, 일할 때 보고서를 쓰는 게 크게 어렵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여행을 다녀온 뒤 감상을 쓰려니 막막하더라고요. 내가 좋아하는 일, 뜨거웠던 경험, 여행 중에 느꼈던 깊이 있는 감정을 충분히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싶은데 한 줄도 못 쓰겠더라고요. 평소 표현력이 좋은 편인 줄 알았는데, 글을 쓰는 건 다른 거더라고요. 그래서 배워야겠다 생각한 거죠.”
글쓰기 모임만 늘어난 게 아니다. ‘글쓰기’를 주제로 하는 책들도 꾸준히 출간되고 있다. 31일 예스24 등 서점 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출간된 글쓰기 관련 인문·실용 서적은 모두 96권이었다. 한 달에 8권꼴로 글쓰기 관련 서적이 나오는 것이다. 대형서점에는 아예 ‘글쓰기’와 관련한 서가 코너가 따로 마련돼 있다. 그만큼 글쓰기 서적에 대한 고정 수요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출판계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고 한다. ‘글쓰기 책이 나오는 족족 다 사 모으는 사람이 대한민국에 5000명은 되는 것 같다’는 말이다. 이 또한 1∼2년 전 이야기라고 한다. 지금은 수요가 더 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방식인 글쓰기에 열광하고 몰입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왜일까.
디지털 시대에 더욱 중요해지는 ‘공감’과 ‘소통’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의 출발점에는 ‘공감’과 ‘소통’이 있다. 지난 5월 31일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하는 포럼 ‘저자의 탄생’에서 발제자 박천홍 아단문고 학예연구실장은 이렇게 말했다. “(글을 쓰고 책을 내는 것은) 자신만의 개성적인 목소리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싶다는 야심, 타자와 관계를 맺고 공감하고 소통하려는 의지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공감과 소통을 제대로 하려면 ‘자신을 아는 것’도 중요하다. 글을 쓰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다. 박 실장은 “저자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것”으로도 해석했다.
글쓰기에 대한 욕구가 커진 데에는 소셜 미디어가 활성화된 것과 관련이 깊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브런치 등을 통해 자신을 표현해내고 자신의 글에 공감하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소셜 미디어에서 활동하면서 ‘글을 쓰고 싶다’ ‘더 잘 쓰고 싶다’는 마음이 커지는 것이다.
한기호 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지금은 초연결사회다. 글로써 자기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고 공감을 얻어내는 게 중요해졌다”며 “글로 사람들과 소통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이끌어내면서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될 수도 있는 시대가 됐다”고 분석했다.
한 소장은 글을 쓰는 것이 자기표현 욕구를 실현하는 데 그치는 정도가 아니라 일종의 ‘생존 수단’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책을 제대로 읽어내고 글을 써내려가는 것은 어떤 사안에 제대로 접근해 문제를 해결해내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작용한다”며 “누구나 책을 쓰게 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글을 쓰지 않으면 삶이 제대로 되지 않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글쓰기가 커리어를 풍성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글쓰기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의견도 있다. ‘쓰기의 말들’ ‘출판사에서 내 책 내는 법’ 등의 글쓰기 책을 성공시킨 유유출판사 조성웅 대표는 “글쓰기가 저자의 경력을 검증해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조 대표는 “책이라는 것 자체가 어떤 분야에서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고, 자신의 권위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독특한 상품”이라며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원할 때 ‘책’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소셜 미디어의 탄생’이 ‘저자의 탄생’으로
소셜 미디어가 활발해지면서 저자의 ‘풀(Pool)’ 자체가 넓어졌다. 오랫동안 출판 분야에서 생산자와 소비자는 철저하게 구분돼 있었다. 책을 쓰는 것은 등단한 작가나 학자 등 전문적으로 글쓰기에 훈련된 사람들로 한정됐다. 전문가들이 생산해내는 책이 소비자인 독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구조가 오랫동안 고착돼 있었다.
하지만 소셜 미디어의 활성화로 생산자와 소비자의 경계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온라인에 쓴 평범한 사람들의 글이 출판사 편집자의 눈에 띄어서 책으로 출간되는 일이 흔해졌다. 베스트셀러 ‘회색인간’의 김동식 작가는 ‘오늘의 유머’라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글을 올리면서 유명해졌다. ‘회색인간’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먼저 빛을 본 뒤 책으로 나오게 됐다. 이 작가의 ‘문장수집생활’도 소셜 미디어에 올린 글들이 눈에 띄면서 출간까지 이르게 된 경우다.
출판 환경 자체도 누구나 저자가 될 수 있는 여건으로 바뀌고 있다. 외국 저자, 등단한 작가, 학자, 글 솜씨가 좋은 유명인들만 책을 내던 환경에서 지금은 아이디어가 좋고 내용이 인상적이면, 유명하지 않고 뛰어난 필력을 자랑하지 않더라도 책을 낼 수 있다. 출판사가 많아지고 출판사 문이 넓어지면서 저자가 될 수 있는 기회 또한 확장됐다.
출판사들이 ‘저자 발굴’에 힘쓰고 있는 것도 많은 이들에게 기회로 작용하고 있다. 경제·경영 서적 출판사인 김형보 어크로스 대표는 “분야별 베스트셀러를 보면 국내 저자의 도서 비중이 60∼70% 정도에 이른다. 과학 분야를 제외하고는 국내서 비중이 계속 높아지는 상황”이라며 “출판사들도 책을 낼 수 있는 국내 저자를 찾는 데 애쓰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대표가 말하는 국내 저자의 장점은 이렇다. 저자가 직접 자신의 책을 홍보할 수 있고, 언제든 인터뷰할 수 있다는 게 유리하고, 번역의 과정을 거치지 않아서 비용도 절감할 수 있다. 경제·경영 분야의 국내서 비중은 2013년 절반 정도였는데 지난해 70% 가까이까지 늘었다고 한다.
글쓰기와 관련한 최근의 변화는 문화예술을 향유하는 방식의 변화로도 분석된다. 예술가나 제작자가 만들어낸 창작품을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문화예술 콘텐츠를 직접 만들고 유통시키면서 재미를 느끼는 문화 소비자들이 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 장민지 연구원은 “미디어의 발달과 오픈 소스의 확산으로 문화 예술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다양한 형태로 얻을 수 있게 됐다. 일방적인 문화 소비에 머무르지 않고 콘텐츠 생산과 유통에 적극적인 개입과 참여를 통해 즐거움을 누리는 방향으로 확장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이용자와 생산자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만인이 저자가 되는 시대’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문수정 기자 thursda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