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전정희] 의병 십자기와 욱일 전범기



지난달 30일 방영된 인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마지막 회.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정미의병’과 관련된 사진이 드라마 속에서 재현됐다. 주인공 유진 초이(이병헌 분)가 외신기자와 함께 의병의 본거지를 찾는 설정이다. 이 외신기자는 실제 인물 프레더릭 아서 매켄지(1869∼1931) 활약에서 따왔다. 영국 런던 발행 데일리메일 소속이었던 그는 러일전쟁(1905) 종군기자로 대한제국에 왔다.

매켄지는 영·일동맹국 기자였기에 한국 내륙 깊숙이 취재가 가능했다. 반면 독일 기자 루돌프 차벨은 같은 종군기자였음에도 취재 목적의 한국 상륙이 불허돼 여행허가서만을 받아 한정된 곳만 볼 수 있었다. 매켄지는 우리에게 귀중한 사료가 되는 ‘정미의병 사진’을 찍었다. 그는 저서 ‘한국의 비극’에서 의병의 저항과 일본군의 진압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그는 청주∼지청 길에서 일본군의 잔혹한 살상을 보게 된다. 그 길가 양민 마을 5분의 4가 잿더미가 됐다고 기록했다. 마을 주민 대개가 죽고 부상자 5명이 잿더미 속에 방치돼 있었다고 했다.

그 와중에 한 줌의 재가 되고만 족보 때문에 망연자실해하는 이들을 보고 “충청도 사람들은 자기 가족이 큰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양반 행세했는데 이것만큼 이들에게 큰 충격은 없었다”며 족보를 생명보다 중시하는 문화에 충격을 받은 글을 남겼다.

그는 이어 원주로 향했다. 그때 그는 경기도 양근에 가면 의병을 만날 수 있다고 들었다. 양근은 지금의 경기도 양평군 양근면 일원이다. 서울과 가까운 곳이어서 의병 활동이 그 어느 지역보다 활발했다. 그가 양근에 들어섰을 때 마을은 폐허 그 자체였다. 불과 1주일 전 일본군이 가옥을 불태우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의병을 쫓는 일본군은 의병에 협조한 마을은 모조리 불살랐다. 이에 분노해 의병의 수는 늘어만 갔다. 그 가운데 주민들은 일본군이 유독 십자 표시가 된 집은 불태우지 않는 것을 목격했다. 일본군이 떠난 후 너나없이 십자기를 내걸었다.

매켄지는 양근에서 의병을 수소문해 인터뷰를 요청했다. 저녁때가 되자 의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그에게 거수경례를 했다. 옛 한국군 군복을 입은 사람과 모시적삼을 입은 사람 등이 뒤섞여 있었다. 그들은 호랑이를 잡던 구식 사냥총에서부터 장난감 총까지 들고 있었다. “(장난감 총은) 아무런 해를 끼칠 수 없는 총이었다”며 “그런데도 그들이 일본 육군에 맞서 수주일 동안 버티어 온 사람들이라니!”하며 놀랐다.

200여명 의병들은 교전 후 부상자 3명의 목숨이 위중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 그래서 양근 마을로 숨어들어 치료받고자 했다. 하지만 2명이 일본군에게 잡혀 난도질을 당했다. 의병들은 이날 밤 매켄지에게 “노예로 사느니 죽는 것이 낫다”며 호소했다.

매켄지가 목격했던 적십자기의 비밀은 또 다른 사진인 ‘양근교회 십자가기 사진’을 통해 풀어 갈 수 있다. 옥성득 교수(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한국기독교학 석좌)가 10여년 전 발굴한 양근교회 사진을 보며 그 십자가 모양새가 왠지 적십자기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가로세로 길이가 같은 적십자기 형태의 십자가기였기 때문이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당시 선교사들은 한국인을 보호하기 위해 적십자기를 내걸라고 당부했던 선교보고서가 있다. 일본군은 교회와 적십자기가 걸린 곳은 공격을 주저했다.

그러나 매켄지는 “일본군이 (한국인) 설교자 집을 침입했다. 그들이 설교자의 아내 방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설교자가 막았고 그는 심하게 두들겨 맞아야 했다”는 전언 기록을 담았다. 매켄지는 1906년부터 2년간 머물렀다. 양근교회 십자가기 사진도 그가 찍은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십자는 예수의 이웃을 향한 사랑을 상징한다. 우리는 십자기 아래서 행해진 일본의 만행을 잊지 않고 있다. 오는 10일 제주 국제관함식에 ‘욱일’ 전범기가 휘날린다면 우리로선 치욕이 아닐 수 없다.

전정희 논설위원 겸 종교2부 선임기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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