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래 칼럼] 화성에서 온 한국, 금성에서 온 일본



상대가 전혀 다른 존재라는 사실 받아들일 때
비로소 배려의 감정 생기고 갈등은 치유될 터
20년 전 ‘김대중-오부치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은
서로를 인정하고 미래를 위한 협력 다짐한 것


뜬금없는 칼럼 제목 탓에 독자들의 비난이 쏟아질까 걱정이다. 이 제목은 1992년 미국의 가정상담전문가 존 그레이 박사가 쓴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화성·금성)’에서 따왔다. ‘화성·금성’은 40여개 언어로 번역될 만큼 세계적인 스테디셀러다. 93년 한국에서도 번역판이 나왔고 이후 다양한 시리즈가 쏟아지고 있다.

‘화성·금성’을 인용한 이유는 우선, 같은 듯 다르고 가까운 듯 먼 한·일 관계를 비유하자면 이 제목만큼 적절한 게 없지 싶어서다. 지난해 그레이 박사가 ‘화성·금성’ 출간 25년 만에 제대로 된 속편을 냈기에 더더욱 그런 생각을 갖게 했다. 원제는 ‘화성과 금성을 넘어: 오늘날 복잡한 세상을 위한 관계기술’인데 일어판 제목은 ‘홀로 있고 싶은 남자, 얘기를 들어줬으면 하는 여자’(2018)다. 일어판 제목이 내용을 더 잘 반영한 듯하다.

또 따른 이유는 올 들어 남북 관계가 급진전되면서 일본과의 관계개선도 중요한 현안으로 떠올라야 마땅한데도 도무지 그 움직임이 보이지 않아서다. 독일 통일을 이뤄낸 서독의 동방정책은 동독과 소련 및 동구권에 대한 접근 노력과 함께 미·영·프 등과의 협력체계 구축이 핵심이었다. 마찬가지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역시 일본의 협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화성·금성’의 핵심은 남녀의 차이를 강조하자는 데 있지 않다. 남자와 여자가 화성인과 금성인처럼 각각 다른 세계관 속에서 살고 있더라도 방법 여하에 따라서는 조율이 가능하고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관계로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을 설파한 것이다. 그렇듯 애증이 교차하고 갈등이 적지 않은 한·일 관계라도 해법은 있다.

대표적인 것이 98년 10월 8일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가 도쿄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내외에 공표한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이하 공동선언)이다. 오늘이 20년 전 바로 그날이다. 이 선언은 한·일을 둘러싼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해 거론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무척 값지다.

우선 과거에 관해 오부치 총리는 “식민지 지배로 인한 한국 국민들의 손해와 고통을 직시”하고 그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 사죄를 표명”했다. 양국의 현재에 대해 한국은 ‘일본의 평화헌법 관철’을, 일본은 ‘한국의 산업화 노력과 민주화 성취’를 높이 평가한다고 밝혔다. 이러한 과거와 현재의 인식 위에서 양국의 미래와 역내의 평화를 거론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한 E H 카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과거와 현재에 대한 분명한 인식은 자연스럽게 미래로 이어진다. 따라서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대화’라는 명제도 가능하다. 현재를 움직이는 것이 과거요, 움직이고 있는 현재는 곧 미래를 엿보게 하는 창이다. 20년 전 공동선언의 높은 역사의식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공동선언은 이후 양국 지도자들에게 제대로 계승되지 못했다. 예컨대 2005년 일본 시마네현 의회는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해 한국의 영유권을 조롱했고,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은 보란 듯이 독도를 방문해 대립을 부추겼다. 지금도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일본 비판이 넘치고, 재한 일본공관 앞에 설치한 소녀상에 대해 국제법 위반이라며 한국을 다그친다.

양국 간 간극은 점점 더 커지는 듯하다. 그럴수록 20년 전의 공동선언 정신이 절실해진다. 무엇보다 상대를 인정하는 자세가 아쉽다. 그런데도 양국의 시민사회와 미디어는 공동선언에서 높이 평가했던 전후 일본의 평화 노력, 한국의 민주화·산업화 성과 등은 외면한 채 서로에 대한 비판과 불만에만 초점을 맞춘다.

‘화성·금성’의 주인공들은 주장이 무척 강하다. 동굴에 처박혀 제 하고 싶은 대로 목소리를 높이고 누가 뭐라고 하든지 자기주장을 내려놓지 않겠다는 한쪽과 잔소리든 넋두리든 내 말 좀 들어줬으면 좋겠다는 다른 한쪽은 분명 별개의 존재다. 어쩌면 한·일은 서로가 다르다는 점을 잊고 있어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것이 아닐까.

서로가 전혀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배려의 감정이 생기고 갈등의 치유가 시작된다. 같다는 것만 중시하면 자칫 다른 것에 대한 차별과 대립으로 치닫기 쉽다. 오히려 서로 다르기 때문에 함께할 수 있고 아니 함께해야 맞다. 그 과정에서 협력의 의미는 더욱 귀중해질 테니 말이다.

한·일 공동선언은 ‘화성에서 온 한국, 금성에서 온 일본’에 대한 해법이었다. 그것은 앞으로도 두고두고 곱씹어 보며 이어가야 할 한·일 관계사의 주춧돌과 같다. 문재인정부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완성시키겠다면 우선 공동선언부터 꼼꼼히 다시 읽어봐야겠다.

대기자 jubi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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