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9일 유럽 순방 중 자신의 소셜 미디어에 클래식 아티스트의 이름을 거론했다. 바로 전날 도널드 투스크 유럽연합(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이 주최한 아셈(ASEM·아시아유럽정상회의) 갈라 만찬에서 쇼팽의 곡을 연주한 피아니스트 임동혁이었다. “한국인에 의해 피어난 아름다운 선율이 지구촌의 모든 갈등을 풀어낼 듯싶다”며 “방탄소년단 등 K팝도 빛났지만 한국 클래식 수준도 세계 최고라는 것을 보여준 연주였다. 참으로 자랑스럽다”고 적었다.
문 대통령이 임기 중에 대중예술인 외의 클래식 아티스트를 직접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싶다. 대통령은 이번 순방 중 다양한 분야의 한국 예술가들을 만났다. 로마 성 베드로 성당에서 개최된 한반도 평화를 위한 특별 미사에는 소프라노 조수미가 참석했다. 한국-바티칸 수교행사에 자주 얼굴을 비치는 그녀는 2014년 교황이 직접 집전한 ‘성모 승천 대축일 미사’에서 특별공연을 펼치며 바티칸과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가장 인상적인 만남은 프랑스 파리 방문 중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마련했다. 지난 15일 밤 엘리제궁에서 개최된 국빈 만찬에서 마크롱 대통령은 프랑스 정계·경제계·문화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 중인 한국계 인사는 물론 한국과 인연이 있는 프랑스 인사들을 초청했다. 문화예술계 인사로는 무용가 안은미를 비롯해 프랑스에서 활약 중인 축구 선수 권창훈과 이영훈 셰프, 판소리 아티스트 로르 마포,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등이 포함됐다.
이 자리에서 마크롱 대통령은 “역사가 끊어놓은 맥을 세계 전역에서 다시 이어주는 예술가들이 있다. 한국의 마에스트로 정명훈 단장은 모친께서 북한에서 출생했는데, 남북한 음악가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를 계획하고 있다고 들었다”며 “파리에서도 이 오케스트라를 모시고 연주회를 열 수 있다면 영광이겠다”고 밝혔다.
정명훈은 지난 2012년 파리에서 북한 은하수 관현악단과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합동 연주를 지휘했다. 이 프-북 합동 연주회는 예정된 남북 합동 공연이 남북 관계의 경색으로 무산된 중에도 북한과의 소통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알려지지 않은 뒷얘기인데, 정명훈은 이 무대에 일부러 해외 국적을 가진 한국의 젊은 음악가들을 불러 북한 단원들과 한 무대에 세웠다. 국가보안법에 저촉되지 않는 선에서 한국 음악가들이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북한 단원들을 도우며 무대 위에서 자연스럽게 소통하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한국 정부가 외면한 이 공연이 성사된 데에는 자크 랑 전 프랑스 문화장관을 비롯한 프랑스 정재계 인사들의 공헌이 컸다. 정명훈이 프랑스를 비롯해 유럽에서 가진 명성이 그들을 움직인 것이다. 마크롱 대통령 또한 정명훈의 파리 연주회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는 애호가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논하고 싶은 것은 대통령의 ‘취향’이 아니다. 그보다는 마크롱 대통령의 문화적 외교력이다. 그가 보여준 한국과 프랑스의 문화적 연결고리는 클래식 음악가는 물론 셰프, 국악인, 체육인, 심지어 교육자까지 아우를 만큼 다양하고 광범위했고, 이들을 그저 초대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연설을 통해 구체적 지식과 정보를 직접 드러냈고, 그에 대한 이해 수준도 매우 높았다. 프랑스는 이 자리에서 문화적 외교력을 한껏 과시했다. 가히 ‘문화 만찬’의 귀감이라 할 이벤트였다.
문 대통령에게 이번 순방이 보다 다양한 예술계와 소통하는 계기가 되길 희망한다. 특히 남북 교류에 더 다양한 분야와 장르의 예술가들을 대동해 우리 정부의 넓은 문화적 시야를 보여줬으면 좋겠다. 지난 9월 평양에서 열린 정상회담 중 우리 측 방문단이 들렀던 만수대 창작사와 김원균명칭 음악종합대학은 한국의 전통예술인과 클래식 음악가, 무용수 등이 동행했다면 더욱 의미 있었을 장소였다.
노승림 <음악 칼럼니스트·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