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들’ 김민희가 전하는 홍상수 생각… “사랑은 개뿔” [리뷰]

영화 ‘풀잎들’에서 아름(왼쪽)이 함께 글을 써보자며 수작을 걸어오는 경수에게 단호히 선을 긋는 장면. 흑백으로 제작된 이 작품은 제68회 베를린영화제 포럼 섹션에 초청됐다. 영화제작 전원사 제공




서울 북촌의 한 골목에 자리한 고즈넉한 커피집. 조용하던 공간은 점차 사람들의 말소리로 채워진다. 막 얼굴을 알리기 시작한 배우 홍수(안재홍)는 친구 미나(공민정)를 만나 죽은 친구 승희에 대해 얘기하다 언성을 높이고, 무일푼의 초라한 신세가 된 중년배우 창수(기주봉)는 오랜만에 만난 성화(서영화)에게 얹혀살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거절당한다.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연극배우 경수(정진영)는 함께 일한 적이 있는 작가 지영(김새벽)에게 한 달 동안 같이 살며 공동 집필을 해보자고 수작을 걸지만 퇴짜 맞는다. 이들의 행태를 지켜보고 있는 이는 아름(김민희)이다. 구석자리에 홀로 앉은 그는 마치 관찰일기라도 쓰듯 그들을 엿듣고 재단하고 자신의 생각을 가만히 노트북에 기록한다.

지극히 일상적인 대화의 향연. 그 별 볼 일 없는 말들 속에서 인생의 통찰이 묻어난다. 사랑에 관한 예찬, 관계에 대한 고민, 삶이 주는 무게, 죽음을 마주하는 두려움 같은 것들이 한데 뒤엉켜있다. ‘홍상수 영화’가 높이 평가받는 건 이런 이유에서일 테다. 아주 사소하고 평범한 듯하면서도 매우 정교하고 비범하다.

25일 개봉한 영화 ‘풀잎들’(사진)은 홍상수(58) 감독이 내놓은 스물두 번째 장편이다. 이번에도 역시 연인인 배우 김민희(35)와 함께했다. 두 사람의 공동 작업은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2015)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7) ‘그 후’(2017) ‘클레어의 카메라(2018)’에 이어 어느덧 다섯 번째다.

신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뮤즈’ 김민희의 역할이다. 두 사람이 협업한 그간의 작품 안에서 김민희는 아름다움을 찬양받는 하나의 대상으로 존재했다면, 이번에는 보다 적극적인 방식으로 홍 감독의 입이 되어 그를 대변한다. 이따금 흐르는 김민희의 내레이션과 극 중 대사들이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이유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친동생 진호(신석호)와 그의 연인 연주(안선영)를 만났을 때 아름은 갑자기 ‘꼰대’가 되어 불같은 훈계를 쏟아낸다. “결혼하려면 서로 잘 알아야지. 잘 모르면서 결혼하고 그렇게 그냥 살고…. 그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엉망으로 사니? 모르면 결혼하면 안 돼. 어차피 해도 실패야. 사랑은 개뿔.”

실제 두 사람이 처한 상황을 연상케 하는 대사는 또 등장한다. 식당에서 아름 일행의 옆자리에 앉은 재명(김명수)은 존경하던 교수의 죽음이 그의 숨겨진 연인 순영(이유영)의 탓이라고 다그치는데, “그 나이 많은 양반을 왜 미치게 했느냐”는 재명의 말에 순영은 “우리는 사랑한 것뿐”이라고 답한다.

이 많은 등장인물을 동원해 홍 감독이 전하고자 한 이야기는 무얼까.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풀잎들’의 의미를 곱씹게 된다. 카페 건너편 슈퍼 앞 고무대야 안에서 옹기종기 자라고 있는 야채 새싹들. 연약한 그들의 삶은 때로 흔들리고 서로 부대끼지만 그 각자의 존재성을 인정받는다. 마치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처럼. 66분. 15세가.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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