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은 촛불 시위가 직접적인 계기가 된 사례로 유명하다. 구동독 시절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에서는 1982년부터 매주 월요일 오후 5시마다 평화의 기도회가 열렸다. 이 기도회는 89년에 이르러 민주화와 독일 통일을 기원하며 정치적 색깔을 띠기 시작했다. 예배가 끝나면 집회 참가자들은 교회 주변을 1시간 동안 걸으며 무언의 시위를 이어갔다.
이것이 바로 ‘베를린 장벽의 첫 균열’이라 일컫는 ‘월요일의 시위’이다. 모이는 시민들의 숫자가 증가함에 따라 동독 정부는 긴장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가을 동독 정부는 1513년 개관한 이래 수백 년 동안 문을 닫은 적이 없는 니콜라이 교회를 폐쇄하기에 이르렀고 월요일 오후 5시에는 교회로 향하는 시내 곳곳을 바리케이드로 봉쇄했다.
그럼에도 시민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89년 10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정확히 한 달 전에도 예정대로 ‘월요일의 시위’는 이어졌다. 집회를 강행할 경우 유혈 진압을 감행하겠다는 정부 방침이 발표되었지만 오히려 동독 전역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교회 내 집회가 끝난 뒤 사람들은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콘서트홀 앞 광장으로 몰려갔다.
무장한 비밀경찰과 군대들이 시위 군중과 대치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바로 석 달 전 중국 베이징 천안문에서 일어난 유혈사태의 기시감으로 긴장은 더욱 고조됐다.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앞장선 사람은 당시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음악 감독이었던 쿠르트 마주어(1927∼2015)였다. 그는 라이프치히의 영향력 있는 정치인 및 지식인을 소집해 폭력을 자제하는 공동호소문을 낭독했다. 호소문 낭독이 끝난 뒤 사람들은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우리는 한 국민이다 (Wir sind ein Volk)’를 외쳤다. 이날 촛불을 들었던 이유에 대해 라이프치히 시에는 이런 안내문이 남아 있다.
“촛불을 들려면 두 손이 필요합니다. 촛불이 꺼지지 않도록 한 손으로 바람을 가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촛불을 쥔 손으로는 돌멩이와 몽둥이를 들 수 없습니다.”
반전(反轉)은 평화집회에 대한 전경과 경찰들의 반응에서 비롯됐다. 그들은 시위 군중들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사실 그보다 이전에 교회 안에서 끝난 기도 집회에서부터 이들 사복경찰들은 참가자들과 함께 찬송가를 불렀다는 증언이 흘러나왔다. 오랫동안 집회에 함께했던 음악과 예술가의 호소가, 그리고 평화를 상징하는 촛불이, 그들을 무장 해제시켰던 것이다.
이 대규모 집회를 기점으로 그 다음 주 월요일 집회는 라이프치히를 넘어서 구동독 전 지역에서 펼쳐졌다. 10월 22일 마주어는 게반트하우스 콘서트홀에서 평화통일을 위한 토론회를 개최했고, 이 회의는 전파를 타고 독일 전역에 생방송됐다. 그리고 우리가 알다시피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은 평화롭게 무너져 내렸다. 평화 통일에 끼친 지대한 공헌을 인정받은 마주어는 이후 통독 대통령 후보로까지 거론됐지만 그는 “내 직업은 지휘자”라며 단호히 뿌리치고 포디엄으로 복귀한 뒤 정치 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2016년, 21세기 대한민국 촛불집회는 다시 한 번 세상을 바꾼 비폭력 평화시위라는 기록을 남겼다. ‘질서’를 외치던 시민들, 서로를 존중하고 격려하던 시민과 경찰, 그리고 양희은, 전인권 등 대중음악가들의 흥겨운 콘서트가 함께한 대한민국의 촛불은 20세기 동독 촛불보다 훨씬 역동적으로 전개됐다.
촛불을 들었던 수만 명의 사람들은 정권 교체 후 쿠르트 마주어처럼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어느덧 촛불집회 2주년을 맞이한 지금, 현실은 여전히 힘겹고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이익집단의 비리는 실망스럽다. 정권은 바뀌었으나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면, 개인의 영달이 아닌 오로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촛불을 들었던 국민들은 언제고 자리를 박차고 나와 다시 촛불을 밝힐 것이다.
<음악 칼럼니스트·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