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건 자전거 타기랑 비슷한 게 아닐까요. 한창 달릴 때 힘 안 들이고 페달을 밟듯이, 쓰기 시작하면 계속 쓰는 거죠. 이미 쓸 만큼 썼는데 할 말이 또 있냐고 놀라는 분도 있을 것 같아요(웃음).”
연극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파수꾼’ ‘결혼’ 등의 작품으로 교과서에서 한 번쯤 만나봤을 극작가 이강백(71). 1971년 희곡 ‘다섯’으로 등단한 그는 반세기 가까운 시간 동안 40편 이상의 연극을 꾸준히 무대에 올린 한국 대표 극작가 중 한 명이다.
상징과 우화적 기법으로 굵직한 메시지를 던지는 데 능한 이 작가는 ‘은유의 작가’로 불린다. 지난 7일부터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관객들을 맞이하고 있는 ‘어둠상자’(연출 이수인)에서도 그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
사진기의 옛 이름인 ‘어둠상자’는 고종의 마지막 어진(御眞·왕의 초상)을 찍은 황실 사진가 집안이 왕의 명령을 받고 4대에 걸쳐 사진을 되찾는 과정을 그렸다. 고종은 1905년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에게 어진을 선물한다. 사진이 조미수호통상조약(1882)의 기억을 되살려 일본의 위협으로 위태로워진 나라를 지켜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앨리스는 “황제다운 존재감이 없고, 둔감하며, 애처롭다”고 조롱한다.
이 역사적 사실에 작가는 ‘내 사진을 찾아내 없애라’는 고종의 명령이 있었을 것이라는 상상력을 덧붙여 이야기를 풀어냈다. 최근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그는 “나라를 빼앗긴 아픔과 충격이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이를 벗어날 수 있을 만큼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걸 사진의 역사로 풀어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이제는 사진(객체)과 실제 인물(주체)이 다른 걸 알지만 그때는 달랐어요. 사진이 고종이고, 나라였죠. 모욕당한 사진과 이를 찾아 없애려는 사진가 가문의 분투를 통해 현대인들이 역사적 굴욕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발견하길 바랐어요.”
구한말에서 시작한 연극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개발독재 시대를 거쳐 지금까지의 역사를 능수능란하게 풀어낸다. “연극은 시간의 제약을 받는다는 선입견을 깨고 오랜 세월을 담은 연극 형식을 실험해 보고 싶었다”는 게 이 작가의 설명이다.
그의 말처럼 무려 108년에 걸친 질곡의 역사가 130분 동안 쉼 없이 펼쳐지지만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어둠상자를 형상화한 무대 연출은 배우들의 움직임에 입체감을 키우고, ‘봄날은 간다’ ‘황성옛터’ 등의 노래가 곳곳에 배치돼 감정의 깊이를 더한다.
이 작가는 “최후까지 극본을 손본다. 마지막으로 고치고 있는데 더는 시간이 없어 연습에 들어갔다는 연락을 받았다”며 호쾌하게 웃었다. “작품이 끝나면 오래 쉬지 않는 편이에요. 다음 작품도 구상 중이고요. 방탄소년단만큼은 아니지만, 믿고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있어 계속 뛸 수 있는 거죠” 그는 여전히 힘껏 페달을 밟는 중이다. 공연은 12월 2일까지.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