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 살인 피로 물든 얘기, 시작한다. 겁이 나냐. 집에 가라. …온몸에 싹, 소름이 쫙, 숨 막혀 탁, 다시 경고한다. 안 늦었다. 갈 거면 빨리 가.”
일단 경고부터 하고 시작한다. 컴컴한 조명 아래 검은 의상을 맞춰 입은 배우들이 부르는 프롤로그. 내용은 의미심장한데 어쩐지 재치가 번뜩인다. 이쯤에서 이 공연의 분위기가 짐작되실는지. 코미디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 사랑과 살인편’이 선사할 달콤 쌉싸름한 이야기 말이다.
‘젠틀맨스 가이드’의 배경은 1900년대 초반 영국 런던이다. 미천한 신분으로 가난하게 살아온 주인공 몬티 나바로(김동완 유연석 서경수)가 자신이 고귀한 다이스퀴스 가문의 여덟 번째 후계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가문을 이끄는 백작이 되기 위해 자신보다 서열이 높은 후계자들을 한 명씩 제거해 나간다.
말하자면 몬티가 저지르는 연쇄살인의 기록이다. 하지만 단 한순간도 심각한 분위기로 빠지지 않고 최대한 장난스러움을 유지한다. 살해 과정을 그리는 방식에 있어서도 장르적 색깔이 뚜렷이 배어난다. 스케이트장 얼음을 깨거나 양봉장의 벌을 푸는 식이다.
극은 시종 유쾌 발랄하다. 대극장 공연으로는 꽤 오랜만인 코미디 장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미국 브로드웨이 라이선스 뮤지컬로 국내 초연이다. 미국식 유머로 가득한 원작을 한국 정서에 맞춰 각색하는 작업이 무엇보다 중요했을 텐데, 이 작업은 만족스러운 성취를 이뤄낸 것으로 보인다.
젊은 관객들을 타깃으로 한 유머가 주로 등장한다. 특히 온라인 유행어가 적극 활용된다. 이를테면 가수 장수원의 어색한 연기 톤으로 화제가 된 “괜찮아요? 많이 놀랐죠?”라든가, 개그맨 유민상의 ‘영혼 없는’ 리액션으로 회자된 “장관이네요. 절경이고요. 신이 주신 선물이네요” 같은.
이처럼 관객의 웃음을 노리고 던지는 대사들이 적재적소에서 폭소를 자아낸다. 적중률이 꽤나 높다. 특히 자신의 명예를 위해 자선사업을 하는 레이디 히아신스(오만석 한지상 이규형)가 “내가 이러려고 불우이웃을 도왔는지 자괴감이 들고 괴로워”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가장 큰 웃음이 터진다.
극은 몬티가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몬티의 비중이 압도적인데다 대사량 또한 엄청나다. 상황이나 인물에 관한 거의 모든 설명이 몬티의 입을 통해 이뤄진다. 몬티 역을 맡은 유연석은 안정적으로 극을 이끌어가는데, 특히 긴 대사를 속사포처럼 쏟아내면서도 완벽하게 전달해낸다. 로맨스 장면에서는 이 분야 ‘장인’다운 면모를 보여준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tvN)에서 일본 낭인 구동매 역을 맡아 남성적인 매력을 발산한 그의 연기 변신이다. 앞서 진행된 프레스콜에서 유연석은 “드라마 촬영이 끝나고 미국으로 휴가를 떠나는 길에 대본을 보고 꼭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단순히 웃음만 주는 게 아니라 훌륭한 음악, 다채로운 연기 등 많은 볼거리가 있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이번 드라마로 너무 큰 사랑을 받아서 어쩌면 시청자들은 낯설게 느끼실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저는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면서 계속 무대에 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관객을 직접 만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건 배우가 누리는 큰 행복인 것 같아요. 다행히 반응도 좋아서 기쁩니다(웃음).”
주인공 몬티만큼이나 강렬한 존재감을 발휘하는 건 다이스퀴스 가문 사람들이다. 한 명의 배우가 무려 1인 9역을 소화한다. 특히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tvN)의 해롱이 역으로 인기를 모은 이규형이 다이스퀴스 역에 합류했는데, 놀라운 역할 소화력으로 극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이규형은 “최근 작품들에서 내면으로 침잠하고 우울한 면이 있는 캐릭터들을 연기하면서 스스로를 발산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면서 “때마침 좋은 작품이 들어와서 제게는 행운이었다. 몬티의 드라마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잘 놀아보려 한다”고 얘기했다. 내년 1월 27일까지 서울 종로구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