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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당-라동철] 위기의 ‘1호 산부인과’



서울 중구 묵정동 동국대 후문 쪽에 있는 제일병원이 지난 28일 법원에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신청했다. 경영 악화로 지난해 11월 입원실과 분만실이 문을 닫았고, 이어 외래진료까지 중단하더니 결국 회생절차를 밟게 됐다. 제일병원의 위기가 주목받는 것은 이 병원의 상징성 때문이다. 제일병원은 1963년 개원한 국내 최초의 산부인과 전문 병원이다. 설립자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의 조카인 고 이동희 전 연세대 의대 교수. 그가 지병으로 숨지면서 90년대 중반 병원이 삼성그룹에 흡수되기도 했지만 2006년 다시 분리됐다.

제일병원은 60, 70년대 출산 붐에 힘입어 아시아 최대 여성전문 병원으로 올라설 정도로 탄탄대로를 걸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삼성가 3, 4세들이 이 병원에서 태어났고 김지미 이영애 고현정 등 연예계 스타들도 이곳에서 출산했다. 해마다 12월 31일 밤 12시가 다가오면 방송사 카메라기자나 신문사 사진기자들이 새해 첫 출생 아이를 취재하러 모여드는 단골병원이었다.

그런 병원의 몰락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무리한 경영과 노사 갈등 등이 겹쳐 폐원 위기를 불렀지만 기저에는 저출산이란 시대적 흐름이 자리 잡고 있다. 국내 출생아 수는 1970년 102만명이 넘었으나 2017년에는 35만7700명으로 쪼그라들었고 지난해에는 33만명대로 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생아가 줄어드니 산부인과 병원들의 경영 여건이 악화되는 건 당연했다. 제일병원도 피해가지 못했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분만 건수가 연간 8000건을 웃돌았으나 2017년에는 4202건으로 급감했다. 이런 상황에서 병원 증개축 등에 대한 무분별한 투자로 빚더미에 오르면서 막다른 골목으로 몰렸다.

산부인과 병원의 위기는 전국적인 현상이다. 관내에 산부인과가 없는 시·군·구가 50곳이 넘는다. 저출산이 몰고 온 위기가 지방에서 수도권으로 확산되더니 이제는 ‘1호 산부인과’까지 집어삼키고 있다. 제일병원이 회생할 가능성은 남아 있다. 법정관리가 받아들여지고 병원을 정상화시킬 인수자를 찾으면 된다. 2011년 이 병원에서 쌍둥이 자녀를 출산한 배우 이영애씨가 컨소시엄을 구성해 인수에 참여할 것이란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제일병원은 폐원 위기에서 기사회생할 수 있을까.

라동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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