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숭배의 대상이 되는 물건이나 사람. 오는 20일 개봉하는 영화 ‘우상’에는 가슴속에 품고 있는 자신만의 우상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하는 세 사람이 등장한다.
들여다보면 이런 인물들이다. 아들의 뺑소니 사고로 도지사 선거를 앞두고 최대 위기를 맞은 정치인 구명회(한석규), 정신지체 장애를 가진 아들 구남의 뺑소니 사망 뒤 감춰진 진실을 찾아 나서는 유중식(설경구), 사고 당일 비밀을 간직한 채 사라진 구남의 조선족 아내 최련화(천우희).
영화는 세 인물의 서사를 퍼즐처럼 짜맞춰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를 완성해낸다. 각자가 추구하는 우상은 무엇인지, 그로 인해 어리석은 선택을 한 이들이 어떤 파국에 다다르는지 서서히 드러난다. 극은 치밀하고도 예리하게 설계됐는데, 묵직하면서 강렬한 진행이 관객을 절로 몰입시킨다.
영화 ‘한공주’(2014)로 성공적인 연출 데뷔를 한 이수진 감독의 신작이다. 초중반까지 영화는 악연으로 얽힌 구명회와 유중식 두 축을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주연배우 한석규(55)와 설경구(51)를 최근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카페에서 각각 만나봤다.
한석규는 ‘우상’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정곡을 찔린 듯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한 문장 한 문장이 치밀했다. ‘초록물고기’(1997) 시나리오를 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연출자가 뭘 얘기하는지 대번에 알겠더라. ‘나를 통해 이 작품을 관객들에게 내보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어떤 작품이든 주제가 중요해요. 뭘 이야기하고자 하느냐는 거죠. 창작자 입장에선 ‘꼭 해야 할 이야기인가’를, 관객 입장에선 ‘들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인가’를 고민해봐야 해요. ‘우상’은 마치 ‘쓴 약’ 같은 영화라고 생각했어요. 병을 낫게 하려면 꼭 먹어야 하는 약 말이죠.”
캐릭터 자체에도 욕심이 났다. 한석규는 “예전부터 비겁한 역할을 해보고 싶었다.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구명회가 딱 그랬다”고 말했다. 이어 “구명회는 첫 등장부터 계속해서 선택의 순간을 마주하고 그에 따라 반응한다. 한데 전부 비겁하고 교활한 반응만 한다”고 덧붙였다.
진중하고 반듯한 이미지에서 변화를 꾀하려 한 의지가 읽힌다. 영화계 최고의 스타로 1990년대를 풍미한 그는 “연기를 오래한 사람의 장점은 동시대 관객들에게 익숙함을 준다는 것이다. 배우의 의도나 가치관을 알기에 신뢰를 보내주신다. 그런데 때로는 그게 단점이 되기도 한다”고 얘기했다.
“과거에는 제가 주체적으로 연기한다고 생각했어요. 서른쯤엔 맹렬하게 달렸죠. 한데 마흔이 되니 지치고 자신이 없어졌어요. ‘이걸 왜 하고 있지?’ 싶었죠. 그러다 쉰쯤 되니 다시 하고 싶더군요. ‘이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이구나’ 싶었어요. 초심을 되찾은 거예요.”
한석규는 “나의 연기 원동력은 ‘새로운 한국영화’를 향한 갈망이다. 한국영화의 르네상스였던 90년대는 그런 영화를 만들기 좋은 시기였고, 그래서 열심히 했다. 최근, 다시 새로운 한국영화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상’이 그런 작품일 거란 확신이 있다”고 전했다.
설경구가 ‘우상’ 출연을 결심한 이유도 한석규와 다르지 않았다. 시나리오에서 선명한 끌림을 느꼈다.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굉장히 답답했어요. 대체 왜 이런 행동을 할까, 계속 고민을 했죠. 그러다 문득 궁금해지더라고요. 유중식이라는 사람이.”
극 중 중식은 목숨처럼 아끼던 아들을 잃은 뒤 며느리의 뱃속에 있는 아이를 지키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든다. 설경구는 “중식이 맹목적으로 매달린 건 핏줄이다. 가족이라는 견고한 성을 쌓고 있던 그는 그 성이 무너졌을 때 두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집착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뜨겁게 시작해 차갑게 끝나는 인물’이라는 설정대로 역할에 몰입했다. “중식은 처음부터 감정의 정점에 달한 상태로 등장해요. 계속해서 흥분한 상태를 유지해야 했죠. 감독님은 제게 ‘독을 품었더라’고 하셨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캐릭터였어요. 현장에서도 늘 예민하고 여유가 없었죠.”
언론에 선공개된 영화는 다소 불친절하고 해석이 쉽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설경구는 “복잡한 생각을 접고 눈이 가는 한 인물을 따라가시라. 가고자 하는 방향이 다 다른 인물들이어서 셋을 한꺼번에 섞는 순간 혼란스러워진다”고 귀띔했다.
본인의 우상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연기’를 말했다. “연기에 맹목적으로 매달리게 돼요. 잘 안되면 더 집착하게 되죠. 연기는 100% 완성이라는 게 없으니까. 매번 부족함과 자괴감을 느껴요. 그래서 더 하고 싶어요. 실패해도, 한 번만 더.”
공교롭게도 출연작 두 편의 개봉 시기가 맞물리게 됐다. ‘우상’ 개봉 2주 뒤에 전도연과 호흡을 맞춘 ‘생일’이 관객을 만난다. “처음에는 ‘나 보고 어떡하라고 이러나’ 싶었죠. 그렇지만 별 수 있나요. 열심히 일해야죠. ‘생일’ 때 또 뵙겠습니다(웃음).”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