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전정희] 심령의 성전은 태울 수 없다



2013년 7월 29일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에서 서로 손잡고 기도하던 네 분의 목사님을 또렷이 기억합니다. 설악산을 배경으로 한 성전 2층 철골조가 세워졌고 이것에 감사해 통성 기도하던 분들이었습니다. 그해 10월 이 성전은 ‘설악산교회’ ‘설악산선교수양관’이라는 이름으로 헌당됐습니다. 그때 그 목사님들은 “북한 복음화의 불길이 이곳에서 시작돼 위쪽으로 타올라 북한 땅이 1907년 평양대부흥회처럼 재현되기를 바란다”라고 소원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이 성전에서는 탈북자 집회 등 성령의 불길로 타올랐습니다. 그 원암리는 인근 큰 사찰이 두 곳의 영향 때문에 교회가 없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조선 시대에는 미시령을 넘기 전의 큰 역이 있었던 고을이었습니다.

설악산교회의 설립은 이러합니다. 73년 복음의 전도자가 되기 위해 총신대에 입학했던 이경석 김광욱 신명섭 유광신 네 사람은 목회의 푸른 꿈을 안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들은 졸업 후 각기 경기도 강원도 인천 충남에서 성공적인 목회를 이어갔죠. 고향도 목포 고성(高城) 부산 청주 등이었고 은사도 다른 이들이었습니다. 이 믿음의 형제들은 수십 년 목회를 통해 북한 선교의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그래서 신학생 때처럼 기도 모임을 이어갔습니다. “영적 가난에 허덕이는 북한 동포를 위해 봉사할 여건을 받았다는 것은 축복 중의 축복”이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청목선교회’의 출발이었죠.

그들은 원칙을 정했습니다. 제아무리 선한 사역이라도 교회 성도와 후임자에 폐가 되는 선교는 하지 말자고요. 그래서 각기 사재를 털어 교회를 헌당했던 것입니다. 김 목사가 땅을 기부했고 나머지 분들은 빚 등을 안고 6억여원을 마련했습니다. 교회에는 주민이 모여들었고 동네는 활기가 돌았습니다.

지난달 4일. TV 속보를 통해 원암리 일대가 불바다로 변한 모습이 방영됐습니다. 몇 번 그곳 집회에 참석했던 터라 너무 놀라 안산 한마음교회 이경석 목사에게 전화하니 떨리는 목소리로 현장으로 가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다음 날 보내온 사진은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처럼 충격적이었습니다. 철골만 남은 채 몽땅 타버린 겁니다. 철골 위 십자가만이 멀쩡했습니다. 어떻게 들판 위 건축물이 그리 잿더미가 될 수 있는지 현장을 가본 저로서는 더욱 이해할 수 없었죠.

하나님 지으신 자연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방법으로 축복과 재앙으로 다가듭니다. 개 줄로 묶여 있어 화마에서 탈출하지 못했던 백구처럼 어느 한순간 우리 인간도 하나님 역사 안에 붙잡히고 말겠죠. 성경은 그래서 ‘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답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충격이 가시기도 전인 지난달 15일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성당이 불탔습니다. 파리의 심장이자 프랑스의 문화적 자존심이었죠. 다행히 십자가는 타지 않았습니다. 그 무렵 한국선교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언더우드 1세의 후대가 살던 서울 연세대 언더우드가 기념관을 취재하게 됐습니다. 그 기념관은 언더우드 2세 이후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복음의 마중물과 같은 역할을 해온 의미 깊은 사택이었죠. 언더우드 2세 부인 와고너 여사가 49년 그 집 현관에서 연세대 사회주의자 학생의 테러 총탄에 희생됐습니다.

그 집은 50년 6·25전쟁 때 폭격으로 불에 타 뼈대만 남기도 했습니다. 당시 남겨진 한 장의 사진이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복원 후 4·19혁명 때는 시위 학생들에 의해 사택이 또 한 번 뒤집혔죠. 게다가 2017년에는 보일러실 화재로 폐관되기도 했죠. 지금의 기념관 전시 사진 가운데 한국인 살림 집사가 언더우드 2세의 어린 자녀를 안고 있는 사진이 있습니다. 이 분의 모습이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연소는 열이라는 에너지를 만듭니다. 성전은 불 타 재가 됐습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 재가 된 겁니다. 그러나 그 에너지, 즉 분자운동화한 에너지는 진동으로 우리를 일깨웁니다. 청목선교회 네 분이 다시 기도의 삽을 들었다고 합니다. 한국해비타트 등에서 임시 컨테이너를 설치해 주는 등 작은 손길이 닿고 있습니다. 성전은 재가 돼도 심령의 성전은 태울 수 없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를 수백 도의 불 속에 던져서도 태울 수 없었습니다. 모세의 불타는 떨기나무의 불은 우리 가슴에 성령의 불을 지폈습니다. 하나님은 파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세우려고 고난을 주십니다. 잠시 받는 환난은 경한 것이라 했습니다. 샬롬.

전정희 뉴콘텐츠부장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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