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전정희] 6·25전쟁, 박완서 박수근 김복순



소설가 박완서의 등단작 ‘나목’은 지금도 꾸준한 스테디셀러입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출제됐을 정도입니다. 전후 소설이자 작가의 성장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1951년 6·25전쟁이 한창이던 때 스물한 살의 박완서는 몰락한 개성 출신 집안 딸로 홀어머니와 어린 조카들까지 책임져야 했습니다. 서울대 국문과 2학년이었죠. 콧대는 높았으나 당장 끼니가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서울 영천 산동네에 살던 그가 어느 날 폐허가 된 시내에서 일자리를 구하다 오빠 친구를 우연히 만나게 됩니다. 자신의 오빠가 전쟁 통에 죽었기 때문에 미군 파카 윗도리로 멋을 낸 그가 고울 리 없었습니다. 그러나 생각은 그러할지라도 ‘번듯한’ 그에게 어렵게 일자리를 부탁합니다. 그가 취직시켜준 곳이 미8군 PX(현 서울 신세계백화점 본점)입니다.

박완서는 그곳에서 한국물산 위탁매장 점원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달 후 초상화부 업무로 옮겼습니다. 그곳엔 궁기 흐르는 다섯 명의 중년 남자가 미군 초상화를 그려주고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죠. 값싼 인조견 스카프에 그림을 그리고 나면 박완서가 짧은 영어로 6달러 정도를 받아내곤 했죠. “나는 그 화가들을 간판장이쯤으로 생각하고 김씨, 이씨 등으로 부르며 무시했다”며 훗날 쑥스러운 고백을 했습니다.

그 ‘간판장이’ 중 한 사람이 국민화가 박수근(1914~65)입니다. 북강원도 금성에 살던 피난민이었던 그는 키 크고 말수가 적었습니다. 화집을 끼고 다녔죠. “그런다고 간판장이가 화가가 될 줄 아남” 속으로 그랬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선전(조선미술전람회) 수상 작가라는 걸 알게 됩니다. 앳된 숙녀는 충격과 부끄러움에 빠지죠. 두 사람의 퇴근길은 같았습니다. 을지로 입구에서 전차를 타야 해서 걷곤 했죠. 그러다 명동 노점에서 태엽만 감아주면 움직이는 침팬지 장난감을 보고 서로 허허로이 웃었습니다. 웃어도 슬펐죠.

박완서는 ‘키다리 아저씨’와 같은 박수근에게 정신적 의지를 하며 하루하루를 견뎌냅니다. “온종일 브로큰 잉글리시로 꼬부라졌던 혀를 풀 수 있는 퇴근시간 후의 작은 행복과 평화마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가슴이 떨리곤 했다”고 합니다. 멀리 대포 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니까요. “그분은 워낙 말수가 적어 주로 나 혼자 말했는데 그의 가족에 관해 물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의 부인이 어떤 여자일까 하는 정도의 궁금증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고 했습니다.

사철 빛바랜 작업복만 입고 오고 간판장이들과 어울려 생활비라도 벌어야 하는 처지에 미루어 그의 아내가 무식하고 거칠고, 온종일 바가지나 긁고 아이들 울릴 능력밖에는 없는 끔찍한 여자로 상상하고 있었죠. 그런데 정작 ‘나목’에서는 그녀를 조선백자에 비유할 만큼 우아하게 그렸죠.

박수근이 죽고 1970년 ‘나목’으로 등단한 박완서는 박수근 유작전에서 그의 부인을 처음 대하게 됩니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 딴판으로 미모와 교양과 품위를 겸비한 분이었다”며 “어찌나 놀랐는지 배신감 비슷한 쓰디쓴 감정까지 솟구쳤다”고 했습니다. 상상력의 배신이었던 거죠. 박수근과의 교유 1년여를 회상하며 털어놓은 이 뒷얘기에 더해 “조금이라도 불순한 게 섞여 있다면 아마 이 정도가 아닌가 싶어 이 기회에 털어놓는다”고 했었죠.

박수근 부인 김복순(1922~79) 전도사는 사별 후 서울 중곡동교회를 섬겼습니다. 금성감리교회에서 한사연 목사(6·25전쟁 때 순교) 주례로 결혼했고 사역보다는 ‘가정’이라는 천국을 지키고자 했던 신여성이었습니다. 그는 전쟁 때 남편을 월남시키고 자신은 스스로 감옥행을 택했죠. 그리고 서울 창신동에 있던 남편을 만나기 위해 자식 둘을 데리고 기적처럼 탈출해 재회합니다.

박수근의 동료 황유엽 화백(작고)의 회고 기록입니다. “박수근은 원래 기독교인이었어요. 부인 따라 기독교적인 생활관으로 살았어요. 그 사람 작품성을 보면 취급하는 것이 전부 가정에서 출발했지요. 자기의 가난한 생활이나 서민 생활을 주로 소재로 다뤘어요.”

김복순의 신앙 일기를 들여다본 미술평론가 최석태는 “부부의 삶과 예술이 연극이나 영화, 음악극 등으로 만들어져 새로운 예술로 이어지길 바란다”고 했습니다. 신앙 밖의 사람들도 이러합니다. 그러니 편벽한 한국교회에 대한 질책으로 들립니다. 어디 김복순 전도사의 이런 얘기뿐이겠습니까.

전정희 뉴콘텐츠부장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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