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는 자는 선하고 쫓기는 자는 악한가. 그리 간단하게 단정 지어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무언가에 사로잡혀 이성이 마비돼버리는 순간, 누구나 짐승 같은 행동을 할 수 있다. 26일 개봉한 영화 ‘비스트’(감독 이정호)는 그렇게나 복잡 미묘한 인간 군상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의 축을 이루는 건 두 베테랑 형사다. 희대의 살인범을 잡기 위해 또 다른 살인사건을 은폐한 강력반 에이스 한수(이성민)와 한수를 제치고 승진하기 위해 그의 뒤를 밟는 라이벌 민태(유재명). 두 사람의 뒤틀린 감정은 각자의 지향점을 향해 맹목적으로 폭주하다 극한으로 치닫는다.
흔한 범죄 스릴러의 외피를 두른 영화는 치밀한 심리 묘사를 통해 차별성을 획득한다. 시종 숨이 막힐 듯 묵직한 분위기가 유지되는데, 그 어두침침한 화면에서 선명히 빛을 발하는 건 배우들의 연기다. 열연을 펼친 이성민(51)과 유재명(46)을 최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각각 만났다.
이성민은 감독에 대한 신뢰로 출연을 결심했다. 그는 “시나리오를 읽어보니 딱 이정호 감독이더라. 이 양반이 인간의 양면을 놓고 변주하는 걸 워낙 좋아한다. 영화가 던지는 질문도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베스트셀러’(2010) ‘방황하는 칼날’(2014)에 이어 세 번째 호흡을 맞췄다.
복합적인 감정에 휩싸인 캐릭터를 연기해내기란 좀처럼 쉽지 않았다. 그는 “감정의 농도가 워낙 세서 힘들었다. 예상보다 훨씬 에너지 소비가 컸다. 보통 작품을 찍을 때 내 일상에는 영향을 받지 않는 편인데, 이번에는 촬영이 끝난 이후에도 굉장히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관객이 한수의 감정선을 따라가도록 하는 게 이 영화의 관건이었다. 하지만 한수가 왜 그토록 범인 잡기에 과도한 집착을 보이는지에 관한 설명이 빠져있다. 이성민은 “인물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게 최우선이었다”며 “편집된 부분이 있으나 극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은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재명과 호흡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찰떡같았다”고 표현했다. “짜릿한 순간들이 많았어요. 서로 미리 말을 맞추지 않아도 기가 막히게 호흡이 맞았죠. 틈을 내주면 여지없이 그걸 캐치해내요. 흔한 말로 선수 혹은 베테랑이라고 하죠. 작품을 보는 눈과 분석력이 매우 좋은 배우이더라고요.”
오랜 조연 생활 끝에 드라마 ‘골든타임’(MBC·2012) ‘미생’(tvN·2014)으로 존재감을 알린 이성민은 첫 주연 영화 ‘로봇 소리’(2016)를 시작으로 활발한 스크린 활약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에는 ‘공작’에서 북한 고위 간부를 연기해 국내 주요 영화상 남우주연상을 휩쓸었다.
“요즘 그런 생각을 해요. 참 다행이다. 어쨌든 역사에 내 이름 하나를 남긴 거니까요. 꿈꿔왔던 일들이 현실이 된 거죠. 좀 더 여유가 생긴 것 같아요. 치열함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조급함을 덜어냈다고 할까요. 또, 연기라는 게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님을 깨달았어요. 이제는 외롭지 않아요.”
유재명에게도 이 작품의 무게는 버거웠단다. 그는 “배우의 숙명 같은 건데, 이번에도 ‘내가 이걸 왜 한다고 했을까’ 후회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면서도 “늘 창작의 고통에서 즐거움을 얻게 되는 것 같다. 분명 힘든 과정이었지만 동료 배우들과 스태프들에게서 위로를 얻었다”고 털어놨다.
“이 영화가 굉장히 멋진 작품이라고 말씀드리기는 낯부끄럽습니다. 하지만 감독님 이하 스태프들이 만들고자 했던 결은 잘 나왔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흥행 스코어가 잘 나오길 바라기보다, 우리의 선택을 관객들이 이해하고 공감해주시길 바라는 게 저의 솔직한 마음입니다.”
‘비스트’를 처음 접했을 때 유재명은 “당최 알 수 없는 느낌”을 받았다. “전체적인 설정은 형사가 범인을 잡는 이야기인데, 여타 작품들처럼 악당을 해치우는 시원함을 주지 않아요. 조미료 하나 없이 인간의 본성을 파고들죠. 그 디테일의 끝은 어디일까 하는 호기심에 이 영화를 선택했습니다.”
평소 팬이었던 이성민과의 호흡은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유재명은 “처음 만나 뵙는 자리에서 선배님께 영광이라고 말씀드렸다”면서 “선배님은 항상 상대에게 눈높이를 맞춰 모든 걸 드러내주신다. 덕분에 마음 놓고 연기할 수 있었다. 영화는 까끌까끌하지만 현장은 화기애애했다”고 웃었다.
개인적인 의미도 있다. ‘비스트’는 연극 무대를 시작으로 부지런히 조단역을 거쳐 온 그에게 영화에서는 처음 ‘주연’ 타이틀을 달아준 작품이다. 그는 “주조단역의 경계는 없다고 생각한다. 주어진 몫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부담이 없진 않으나 동료들과의 공동 작업이므로 편하게 생각하려 한다”고 했다.
지난해 10월 결혼한 유재명은 오는 8월 아빠가 된다. 첫아이와의 만남을 앞둔 그는 “정말 신기하고 감사한 일”이라며 감격해했다. “떠돌이 생활만 하다 이제야 남들과 비슷하게 사니 부모님이 참 좋아하세요. 남편, 아빠, 효도. 살면서 한 번도 안 해본 것들을 요즘 다 하고 있습니다(웃음).”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