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삶은 조국에, 죽음은 하나님께’… 남편 뜻을 좇다

경기도 광주 시내에서 이천 방향으로 가는 길에 있는 대쌍고개. 6·25전쟁 무렵만 하더라도 대쌍고개와 소쌍고개를 연이어 넘어야 하는 험준한 곳이었다. 독립운동가 김예진 목사는 인민군에 의해 이 고개에서 집단 학살됐고 사모 한도신은 남편의 시신이라도 찾기 위해 매장 터를 파헤쳐야 했다.
 
집단 학살 현장에서 가족을 찾는 사람들. 6·25전쟁 사진이다.
 
1964년 김구 선생 추도식에서의 한도신 사모(왼쪽 두 번째).
 
부부가 각각 어린 자녀를 안고 찍은 2남 4녀 가족사진.
 
서울 후암동 김예진 한도신 부부의 월남 후 집터.
 
김예진은 서울 후암동 후암교회 초대 목사였다.






“내 나라, 내 집에서, 내 나라 사람들에 의해 죽는구나…”.

1950년 8월 초 독립운동가 김예진 목사의 사모 한도신은 이렇게 탄식하며 마지막 기도를 올렸다. 6·25전쟁 발발과 함께 3일 만에 서울을 접수한 인민군은 반동세력 제거에 나섰고 서울 후암교회 목사 김예진 가족도 제거 대상이었다.

인민군은 청년들만 보면 잡아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전선의 총알받이로 썼다. 한도신은 교회 청년들을 집에 숨기느라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벽장 천장을 뜯고 그 속에 숨어 지내게 했다. 아들과 사위 역시 그렇게 숨겼다.

어느 날 정치보위부와 민주청년연맹 사람들이 총과 몽둥이를 들고 난입해 남편과 자식들을 어디다 숨겼냐며 위협했다. “모두 남쪽으로 피난 갔습네다. 죽인다 한들 찾아낼 길이 없습네다.” 한도신은 고향 사투리로 그들을 막아섰다. 그리고 보안대로 끌려가 취조를 받았다. 그곳에서도 남편을 찾아내라는 모욕과 구타가 계속됐다.

“나는 모욕을 당하면서 묻고 또 물었다. 왜 이렇게 같은 동포끼리 서로 미워하고 때려죽이는 것일까. 일본놈들에게 나라를 찾기 위해 싸우다가 갖은 수모와 고통을 당했는데 이제 내 나라에서 같은 민족을 무서워하게 됐으니…”.

독립운동가 아내가 당한 모욕과 고통

한도신은 목사 사모로, 독립운동가의 아내로 일제와 전쟁을 이겨내며 살아남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딸로 살아온 이야기를 ‘꿈 갓흔 옛날 피 압흔 니야기’라는 책으로 남겼다. 차남 김동수와 언론인 오연호가 정리했다.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김예진은 3·1운동에 나섰고 비밀결사 대한일신청년단을 조직해 평남도청 폭파 사건을 주도했다. 상해 등에서 김구 선생의 독립운동에도 가담했다. 수배와 체포, 수감생활 중에도 신학 공부를 계속해 7년 만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순안 평리교회, 평원 갈원교회, 만주 봉황성교회 등에서 시무했다. 신사참배 거부로 설교를 정지당하고 구류에 처해졌으나 이에 굴하지 않았다. 김예진에게 일본은 적그리스도였다.

1945년 해방이 됐다. 적그리스도가 없는 세상이 됐다. 그는 서울 후암동에 후암교회를 세우고 가난한 이들의 영혼을 달랬다. 기독교 박해를 피해 월남한 수많은 이웃과 친인척을 거두었다. 그러는 중에도 전도가 사명이라며 전국 순회 개척 전도에 나서 13개 교회를 세웠다.

예수와 민족을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남편을 둔 아내는 어땠을까.

“월남해서 후암동 집에 머물다 간 친척과 교인의 식구는 무려 열한 집이었다. 1년 반까지 살다 살림 차려 나간 이도 있었다.… 쌀 뒤주를 보니 쌀이 하나도 없다.”

그때 막내딸 명자가 영양실조로 병이 나 사경을 헤맸다. 남대문 세브란스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병이 너무 오래됐다며 먹고 싶은 것 먹이라고 했다. 살 가망성이 없다는 뜻이었다.

“아이가 세 집을 합해서 12명이었던 터라 딸에게 실과 하나도 먹일 수 없었다. 너무 인간들에게 시달렸고 경제 곤란이 심해서 어서 하나라도 죽어 없어졌으면 했다. 너무 고생하다 보면 그런 끔찍한 생각을 서슴없이 하게 되는 것이다.”

“오마니, 나는 오마니하고 살고파.” “어서 죽어서 천국에 가거라.” “천국에 간다고 해도 저 하늘을 쳐다보면 저기를 어떻게 올라갈까 무서운 생각이 나서 죽고 싶지가 않아.”

병원을 나서며 등에 업힌 딸과 그렇게 얘기했다고 회한의 기록을 남겼다.

“애처롭고 불쌍한 것을 고쳐주지 못해서 죽게 했다. 나는 죄인 중 죄인이다.”

이 ‘죄 많은 여인’은 오로지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무거운 십자가를 졌다. 십자가를 진 남편까지 등에 업고 골고다로 향하는 모진 세월이었다.

“파도 파도 죽은 사람 몸뚱어리만…”

지난 6일 경기도 광주 소위 대쌍고개(또는 경안고개). 지금이야 왕복 4차선 대로가 뚫려 고개 같지도 않지만 1950년 무렵만 하더라도 큰 고개를 넘고 다시 작은 고개를 넘어야 하는 험준한 곳이었다. 지금도 마을 이름이 대쌍령리이다. 그 고개 서울 쪽 내리막 쌍령육교에 서니 멀리 경안천과 광주 시내가 들어온다. 도시는 고개를 잠식하며 밀고 올라오고 고개 턱 앞까지 온 고층 아파트는 ‘순교자의 고개’를 초라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 고개의 순교자 김예진의 죽음을 누가 알 것이며 누가 기억할 것인가. 이 고개에 개척된 3~4개 교회마저 이를 알지 못했다.

“나는 남편의 시신이나마 찾기 위해 석받이(대쌍고개) 집단 매장지로 찾아갔다. 얼굴에 수건을 뒤집어쓰고 매장지를 파 내려가자 여기저기서 시체가 나오기 시작했다. 벗겨진 두개골, 검은 핏자국, 찢어진 옷 사이로 찢어진 살…. 이를 악물고 시체를 하나씩 밀쳐내며 남편을 찾아 헤맸다.… 남편의 앞니 중 하나는 금니였다. 결혼 전에 내 머리카락을 잘라 모은 돈으로 해준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나를 보러 왔다가 가는 길에 넘어져 이가 하나 부러졌는데 그때 해줬다.… 나는 시신이나마 찾아 영혼을 위로해주고 싶었다. 나는 마치 미친 사람과 같았다. 파도 파도 죽은 사람의 몸뚱어리만 나왔다.”

그 많은 시신을 어떻게 파헤칠 것인가. 한도신은 이 고개에서 하나님을 울부짖으며 통곡했고 까무러쳤다. ‘삶은 조국에, 죽음은 하나님께’라는 믿음을 갖고 있던 남편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남편이 8월 2일 광주 미사리 최 장로라는 분의 집으로 피난 가던 길에 내무서원에 잡혀 모진 고문 끝에 이 고개에서 총살당한 것이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백기준(당시 동회장)이라는 이가 전해줬다. 김예진은 ‘딸을 미국놈에게 팔아먹고 일본으로 도망하려던 민족반역자’라고 쓴 종이를 붙인 채 끌려다녔다고 했다.

백기준은 “결박당한 목사님은 와중에도 ‘예수를 믿고 회개하면 하나님이 당신들의 죄를 용서해 줄 것’이라며 외쳤다”고 했다. 8월 10일 독립운동가 김예진은 그렇게 순교했다. 그해 여름의 참상을 한도신은 꾹꾹 눌러 후세에 전했다.

그 대쌍고개를 넘으면 도로 오른쪽으로 정충묘(精忠廟)가 나온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갇힌 인조를 구하려다 이곳에서 청군에 죽은 5인의 장수를 기리는 곳이다. 그들 아래 수만 명의 병사가 매복한 청군에 몰살당한 치욕의 전투였다. 광주시가 매년 장군들을 위한 제향을 한다.

정충묘 옆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 광주동산교회 ‘아름다운 전원교회’ 예배당이 있었다. 마침 새벽 기도가 끝나는 시간이었다. 교회 사인보드에 ‘튜닝으로 세상 위에 부어지는 마중물교회’라는 문구가 들어왔다.

한도신 사모 (1895~1986)

평남 대동 태생으로 신앙 안에서 자랐다. 1913년 평양 양잠학교에서 수학했으며 1915년 김예진과 신식 결혼식을 했다. 3·1운동 때 재봉틀로 태극기를 만들어 남편에게 건넸다. 1922년 상해로 건너가 김구 안창호 여운형 등을 가까이 모시며 항일투쟁을 도왔고 경교장에서 김구 선생의 죽음 전후를 지켜봤다. 남편 순교 후 2남 4녀를 홀로 키웠고 1963년 서울시 모범어머니상을 받았다.

김예진 목사 (1898~1950)

평남 강서 태생으로 열세 살에 목사가 되기로 했다.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산정현교회를 섬겼다. 1917년 ‘민족의 십자가’를 제목으로 연설한 것이 독립운동의 시작이었다. 3·1운동과 평남도청 폭파사건 등에 참여한 뒤 상해로 탈출, 김구 등과 독립운동을 했다. 1937년 평양신학교 졸업 후 평원 갈원교회 등에 부임했으나 신사참배 거부로 또다시 고초를 당했다. 1946년 후암교회 초대 목사. 순교 후 건국공로훈장을 받았으며 서울 국립현충원에 안장돼 있다.

광주=글·사진 전정희 뉴콘텐츠부장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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