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의 ‘한·일 수출규제 양자협의’를 앞두고 기싸움이 팽팽하다. 일본은 공식 만남의 격과 급을 낮추는 ‘형식 파괴’ 전략을 택했다. 양자협의 대신 ‘설명회’라는 표현을 쓰며 국가 간 협의가 아니라는 해석까지 내놓고 있다. 대표를 과장급으로 낮춘 데 이어 회의 수준도 떨어뜨리겠다고 나선 것이다. 한국 정부의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복안이 깔렸다.
반면 한국 정부는 협의체 성격을 띤 양자협의라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입장이 관철되지 않더라도 실익이 있다는 ‘손익계산서’를 뽑고 있다. 일본 정부로부터 공식적으로 수출규제의 근거를 들을 첫 기회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일본에 공식적으로 문제제기를 했다는 ‘기록’이 남는다는 점도 긍정적이다.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단계로 넘어갈 경우 ‘적극적 대응’의 근거로 남을 수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12일 오후 일본 도쿄에서 전략물자 수출규제 관련 양자협의를 진행한다고 11일 밝혔다. 한국 측 대표단은 산업부 무역안보과장 등 2명, 일본 측은 경제산업성 안전보장무역관리과장 등이 참석한다.
정부는 당초 양자협의 대표를 국장급 이상으로 하자고 일본 측에 요청했었다. 고위급이 직접 나서서 속전속결로 갈등을 해결하려는 셈법이었다. 하지만 일본 측은 즉답을 피하다 과장급 실무진 협의를 하자며 수준을 낮췄다. 그러면서 공식 협의가 아닌 양국의 입장을 교환하는 일종의 설명회로 만남의 성격을 규정했다. 협상이나 협의가 아닌 만큼 한국 측 요구를 듣지 않겠다는 취지로 읽힌다. 양자협의가 실질적 결과물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인 이유다.
그러나 긍정적 측면도 없는 건 아니다. 정부는 이번 협의가 일본의 수출규제 이후 첫 만남이라는 점에 의미를 둔다. 일본 정부는 대(對)한국 수출규제를 결정하면서도 양국의 공식 채널을 통해 구체적인 근거를 밝힌 적이 없다. 산업부 고위 관계자는 “전략물자 통제가 전문적이고 기술적 분야라 일본의 조치 경위와 수출허가 절차 변경 내용 등을 실무진이 심도있게 논의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향후 제도 운용 방향과 수출규제 관련 세부 사항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데 유용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부는 이번 양자협의를 국장급 이상 고위급 협의로 가는 ‘지렛대’로 삼을 계획이다. 이 관계자는 “한국 측 입장을 분명히 전달할 소중한 기회다. 향후 급을 격상한 논의도 추진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수출 전략물자 통제 관련 한·일 양자협의는 2016년 국장급 협의로 개최된 바 있다.
여기에다 ‘기록’이 남는다는 점도 이득이다. 비록 실무진급이지만 양자협의는 한국 측이 사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지속했다는 근거가 될 수 있다. 산업부 관계자는 “향후 WTO 제소 단계로 가게 되면 이번 양자협상이 WTO 분쟁해결 절차 첫 단계인 양자협의 과정의 비공식 첫 협상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산업부는 이날 불화수소 등 전략물자가 한국에서 북한으로 유출됐다는 일본의 의혹 제기를 재차 반박했다. 박태성 산업부 무역투자실장은 “일본의 주장은 무허가 수출 적발 건수가 많은 미국의 수출통제 제도를 신뢰할 수 없다는 주장과 다를 바 없다”며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수출통제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고 평가받는 미국도 무허가 수출이 적발되고 있다”고 말했다.
세종=전성필 기자 f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