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수출 규제’라는 복병에 한국 주력산업인 반도체, 디스플레이업계에 비상이 걸린 사태는 그동안 기초과학을 외면해온 결과물이라는 자성의 목소리가 잇따르고 있다.
11일 업계에 따르면 수출규제 조치 대상인 폴리이미드, 레지스트, 에칭가스(고순도 불화수소) 등 반도체·디스플레이 주요 소재 외에도 수소차 저장용기의 탄소섬유, 스마트폰에 사용되는 이미지센서 등도 여전히 일본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일본은 물리나 화학 부문에서 노벨상을 수상하는 등 기초과학에 힘을 써왔기 때문에 이 격차를 해소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우리 기업들의 연구·개발(R&D)도 핵심 소재·원재료 개발을 위한 기초과학보다는 완제품을 만들기 위한 응용과학 위주였다는 것이다.
조문호 기초과학연구원(IBS) 원자제어저차원전자계 연구단 부연구단장은 “소재부품이 꼭 있어야 하는 부분이지만 아직 국산화가 안 된 이유는 기초연구, 응용연구, 기반기술의 연구의 분리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신소재를 활용한 시스템을 만드는 연구에는 관심이 많은데 정작 신재료 연구가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이른 시일 내 완성품을 개발·판매해 산업을 키워야 한다는 식의 경제논리가 기초 소재기술 등을 탄탄하게 만들지 못한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김창영 기초과학연구원 강상관계물질연구단 부연구단장은 “기초과학과 수익성을 위한 산업은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며 “빨리 성과를 내서 이윤을 창출해야 하는 것에 집중하다보니 기초 설비, 재료 등은 일본에 의존하는 부분이 여전히 많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비단 제조업뿐만 아니라 통신산업도 마찬가지다. 탄소섬유도 국내에 생산업체들이 있지만 아직 기술력으로는 일본의 도레이에 못 미친다.
대기업 위주의 R&D 발전도 우리 산업의 자생력이 약해진 요인이다. 이번 사태로 반도체 업계는 일본산 소재와 품질이 비슷한 대체재를 국내에서 찾으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일본은 전 세계 시장을 대부분 점유하고 있는 소재를 개발하는 강한 중소·중견기업이 많다. 김 단장은 “기초기술을 바탕으로 한 중견기업들이 발전하려면 대기업의 단가 낮추기 등 상생을 저해하는 행위가 없어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향후 각 산업의 주요 소재·부품 전반을 어떻게 보강할지는 정부, 기업이 함께 고심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소재 개발에 성공한 중견기업에는 정부지원금 지급, 세액공제 확대 등 인센티브를 주고 산업계와 학계가 기초·응용 부문에서 분업을 강화하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다.
최예슬 기자 smart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