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경제보복 조치가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자 국내 주요 기업들이 ‘컨틴전시 플랜’(불확실한 미래에 대응하는 비상 계획)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미·중 통상 분쟁과 일본의 수출 규제 등 국내 산업에 치명타가 될 수 있는 돌발 대외 악재가 잇따르자 경영 전략 전반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는 등 비상체제에 들어간 분위기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15일 “일본의 수출 규제로 인한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양국의 지도자가 서로 강경 일변도로 대응하는 상황이 두렵기까지 하다”고 위기감을 드러냈다. 이어 “국제적으로 원재료 등 공급망이 촘촘하게 얽혀 있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데, 한 부분만 고장이 나도 전체를 못 쓰게 되는 상황이 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한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일본에서의 원재료 공급이 멈춘다는 가정 하에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며 “이는 전자·반도체 업계 분위기가 모두 비슷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원재료 공급이 되지 않는 상황이 오면 전면적인 비상대책을 수립하는 게 당연하다.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고 전했다.
올 초 수립했던 경영 전략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는 동시에 원자재 수급, 자금, 판매, 영업, 마케팅, 해외 글로벌 시장 등을 다시 살피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일본의 수출 규제는 대기업뿐만 아니라 전후방 산업에도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첨단소재, 전자, 통신, 센서 등의 부품·품목을 수입하는 기업들도 타격을 피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통제가 불가능한 대외적인 변수가 이어지면서 기업들은 사장단 등 고위 관계자가 참석하는 회의를 열어 머리를 맞대고 있다. 이런 현상은 당장 일본의 수출 규제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반도체, 디스플레이 업계는 물론 유통업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롯데그룹은 16일부터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에서 하반기 사장단회의를 열기로 했다. 이번 회의는 무려 5일 동안 진행되는데, 처음 있는 일이다. 일본 경제보복 등 대외 환경 변화 등 다뤄야 할 현안이 그만큼 많다는 해석이 나온다.
롯데그룹의 사장단회의는 1년에 두 차례로 정례화된 회의지만 최근 신동빈 회장이 일본을 다녀온 상황에서 컨틴전시 플랜이 나오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나온다. 신 회장을 비롯해 계열사 대표, 지주사 임원 등 100명이 한자리에 모이는 회의인 만큼 한·일 관계 위기로 인한 돌파구 관련 논의가 이뤄질 전망이다.
앞서 일본을 다녀온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귀국과 동시에 컨틴전시 플랜 수립을 당부하기도 했다. 삼성전자는 이 부회장이 일본에서 귀국하자마자 주말임에도 긴급 사장단회의를 소집해 핵심소재 대체재 발굴, 거래처 다변화 등을 논의했다.
이는 일본의 수출 규제가 장기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반도체뿐만 아니라 사업 전반에 악영향을 끼칠 경우를 대비해 그룹 차원의 철저한 대응책 마련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일본 수출 규제의 영향이 확산될 수 있다는 우려다.
김성훈 기자 hunh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