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지난 9일 최선희 제1부상 담화를 통해 비핵화 실무협상에 나서겠다는 뜻을 전격적으로 밝힌 배경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미국과의 비핵화 협상에 제시한 시한인 ‘연말’이 가까워지자 북한이 움직인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북·미 비핵화 협상에서 특별한 성과 없이 시간을 보내기에는 북한의 사정이 여의치 않을 수도 있다. 일각에서는 한층 강도가 높아진 미국의 압박이 북한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북·미는 지난 6월 김 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판문점에서 역사적인 회동을 가졌지만 이후 비핵화 협상은 답보 상태를 이어갔다. 북한은 최근까지 한·미 연합 군사훈련 등을 근거로 대미·대남 비난만 해왔다.
북한의 갑작스러운 대화 제의는 김 위원장이 지난 4월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강조한 비핵화 협상 시한인 연말이 다가왔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달 말부터 연말까지 따져보면 앞으로 협상 시간이 3개월여밖에 남지 않았고, 오는 12월부터 미국은 대선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미국은 또 연말에는 각각 일주일 가까이 이어지는 추수감사절 휴가 및 성탄절 휴가가 있다. 북·미가 대화에 집중할 수 있는 물리적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또 비핵화 협상에서 아무런 성과 없이 해를 넘기는 것은 지난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노딜’로 이미 상처를 한번 입은 김 위원장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
최근 강해진 미국의 공세도 북한을 협상판으로 다시 불러낸 것으로 관측된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지난 8일 “김 위원장이 협상 테이블로 복귀하지 않을 경우 트럼프 대통령이 실망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앞서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는 지난 5일 대학 특강에서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이 실패할 경우 한국과 일본이 핵무장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북·미 비핵화 협상의 ‘키맨’인 트럼프 대통령을 직접 거론하고, 핵무장론까지 꺼내들면서 미국이 고강도로 북한을 압박한 것이다. 이 같은 미국의 메시지에 북한도 협상판 자체가 깨질 수 있다는 우려를 가지고 전격적인 대화 제의를 한 것으로 관측된다.
박원곤 한동대 국제지역학 교수는 “지난 6월 판문점 회동 때 실무협상 재개를 약속했는데 계속 늦어지게 되면 북한이 트럼프 대통령을 바보로 만든 셈이 된다”며 “최근 북한에 대한 미국 측 경고 수위가 높아진 게 주효한 것 같다”고 말했다.
안제노 국가안보전략연구원 평화전략연구실장은 “북한은 최고지도자가 협상 시한으로 정한 연말이 다가오니 넋 놓고 있기는 어려운 상황이어서 대화 제의를 해본 것 같다”며 “이달 말에 한 번 만나봤다가 여의치 않으면 다음에 또 할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일각에서는 왕이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의 최근 방북도 북한의 대화 제의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왕 국무위원은 지난 2~4일 평양을 찾아 리수용 노동당 부위원장과 리용호 외무상 등 북한 외교라인 핵심 인사들을 만났다. 왕 국무위원 방북 때 중국이 막힌 북·미 대화 채널에서 소통 창구 역할을 하고, 대화 재개를 적극 장려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상헌 기자 kmpap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