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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노트-전석순] 경로 의존 법칙



버스는 짐작과 다른 길로 가고 있었다. 좌회전해야 할 지점을 지나쳤다. 우물쭈물하는 사이 일순 풍경이 달라졌다. 서너 정거장쯤 지나쳤을 때 9번을 타야 하는데 8번을 탔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음 정류장에서 바로 내렸지만 익숙한 건물은 남아 있지 않았다. 약속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어 걷기로 했다. 골목 안쪽으로 들어서니 소극장이 보였다. 큰길로만 다녔을 때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공간이었다.

매번 가던 길은 안정감을 준다. 망설이지 않고 빠르게 나아갈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 걷는 거리는 다르다. 불안한 마음에 사방을 두리번거리느라 걸음은 늦춰지고 예상치 못한 턱에 걸려 넘어지기도 한다. 어떨 땐 막다른 길에 다다를 때도 있다. 반면 새로운 식당이나 공원을 만날 수도 있다. 언젠가 한참 찾아 헤맸던 우체통과 마주칠 수도 있겠다. 우리가 일상에서 겪을 수 있는 경로 의존 법칙이다.

경로 의존 법칙이란 한 번 길이 정해지면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때로는 효율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더 나은 방향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달라지지 않을 때도 많다. 예를 들어 동전 옆면에 새겨진 빗금을 생각해볼 수 있다. 오래전 금화가 있던 시기에는 만드는 과정에서 옆면을 미세하게 갈아내 이득을 취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부당이득을 방지하기 위해 동전 옆면에 빗금을 넣기 시작했다.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동전을 만드는 재료는 값비싼 금속이 아니다 보니 굳이 빗금을 넣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나라에서는 빗금을 넣고 있다. 타자를 너무 빨리 치면 타자기의 봉이 엉킬 것을 염려해서 느리게 치게끔 구성한 자판 배열이 지금까지 그대로 쓰이고 있는 사정도 비슷하다. 빠르게 타이핑할 수 있는 효율적인 배열이 있지만 바뀌기는 쉽지 않다. 기존에 쓰던 방식에 익숙해져 있고 변화는 번거롭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은 우리의 생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어떤 문제에 닥칠 때마다 늘 해왔던 방식대로 해결하거나 같은 사람에게 조언을 구할 때가 많다. 공부하거나 길을 찾는 방식도 매번 비슷하다. 그것이 가장 편하고 안전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때로는 기존의 경로를 이탈해보는 것으로 새로운 해결책을 만날 수도 있다. 쓰레기 무단투기 문제를 다룰 때 더 강력한 경고문구와 벌금 쪽으로만 고민하다가 화단을 조성하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을 때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빠른 속도와 안전성 사이에서 균형을 찾던 엘리베이터는 안에 거울을 다는 것으로 느린 속도에 대한 불만을 줄이기도 한다. 길거리에서 흔히 지나치는 맨홀 뚜껑에 디자인을 넣어 관광객을 유치하거나 무채색의 가전제품에 다양한 색을 넣어 인기를 끈 경우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다른 방향이 언제나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손해를 불러오기도 하고 기존의 방식보다 더 혼란스럽기만 할 때도 있다. 또한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부담을 떨쳐낼 수 있는 사회적인 환경과 여유 있는 분위기도 뒷받침되어야 한다. 하지만 일관된 방식에 매몰되는 것을 경계하며 늘 새로운 방식에 대해 열어두는 태도는 중요하다. 아인슈타인은 “어제와 똑같이 살면서 다른 미래를 기대하는 것은 정신병 초기 증세”라고까지 했다고 한다. 발전은 기존에 있었던 방식을 고집하는 데에서 오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다른 방식을 고민하는 데에서 왔다. 교통카드나 버스전용차로 등과 같은 시스템의 변화도 기존 방식을 전환하는 것에서 시작됐다.

나의 고향은 50년 만에 시내버스 노선이 전편 개편될 예정이다. 처음으로 마을버스가 운행될 예정이고 환승센터를 만들어 좀 더 쉽게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을 예정이다. 복잡했던 노선을 단순화하고 배차 간격을 조정해 누구라도 쉽게 버스를 이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더 나은 방향으로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이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수고로움을 앞선 것이다.

한편 댐에 대한 의견이 활발히 오가기도 한다. 홍수조절이나 발전과 같은 고유의 기능이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십년 동안 유지해온 도시의 이미지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보니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매 순간 경로를 유지할 것인지 벗어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그 과정에 이르러서야 안정과 발전 사이의 균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전석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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