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배승민] 따끈한 어린 시절



체크인을 하려는데, 직원이 투숙객에게 무료 사우나가 있다고 안내한다. 어릴 적 이후로는 목욕탕에 가본 적이 거의 없고 시간 여유도 없어 망설이는데, 고장에서 나름 유명하다는 숙소 직원의 말에 경험 삼아 가보기로 했다. 오래 세월이 묻어나는 낡은 시설이었지만, 직원의 자랑이 사실이었는지 안은 꽤나 북적였다. 장난치며 놀 생각뿐인 아이들, 본인 챙기기보다 아이들을 씻기느라 바쁜 젊은 엄마들, 가정과 아이들을 건사해 온 흔적이 온몸에 훈장처럼 부항 자국으로 남은 나이든 어머니들, 아픈 관절을 뜨끈한 물에 담그고 지인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할머니들. 그 사이에서 “뛰지 말라고 했지!”라는 어른들의 꾸중에 살짝 눈치를 보는 척하거나, 기어이 엄마에게 잡혀 때를 밀리는 아이의 부루퉁한 표정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이런저런 생각 속에 뜨끈한 물에 잠겨 있다 보니, 며칠 동안 밤낮없이 밀린 일에 시달린 피로마저도 씻겨나가고 노곤함이 밀려왔다.

여행지에서의 예상치 못한 시간에 만족하며 나오다 보니 들어올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음료수 코너가 있었다. 어릴 때 어머니에게 졸라 가끔 선물처럼 마시던, 제법 비쌌던 달콤한 우유는 수십 년 전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뜨거운 물에 푹 잠겨있다 나와, 약간 몽롱하고 피곤한 상태에서 마시던 차갑고도 달콤한 맛이 떠올랐다. 돌아오는 길에 이 이야기를 동생에게 했더니 곧장 핀잔이 돌아왔다. 나야 형제 중 가장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가끔 그 비싼 우유가 허락되었지만, 어린 동생들은 잘해봤자 작은 요구르트뿐이었다는 것이다. 역시나 인간의 기억은 어찌나 선택적인지. 어린 시절의 달콤한 기억이 머쓱한 차별의 현장이 되었지만, 그 당시 지금의 우리보다 어리던 어머니와 꼬맹이 시절의 우리를 이야기하며 꽃 핀 수다는 피로를 녹여주던 뜨끈한 물만큼이나 잔잔했다. 요즘은 집마다 욕조가 있고 수도 시설도 잘되어 있어 예전만큼 동네 목욕탕 장사가 잘 안 된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도 가끔은 가족과 훌쩍 목욕탕에 갔다가 우유든 요구르트든 나눠 마시며 돌아오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몸도 마음도 쉬어 가면서.

배승민 의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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