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오피니언  >  칼럼  >  한마당

[한마당-천지우] 구시대 적폐의 애국심



알렉산드르 로스토프 백작은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정부가 들어선 뒤 ‘구시대의 적폐’로 몰려 모스크바 메트로폴 호텔에 죽을 때까지 감금되는 형벌을 받는다. 몇 년을 그럭저럭 버텼으나 이제 그만 목숨을 끊기로 작정한 로스토프 백작은 생의 마지막 일정으로 호텔 바에서 혼자 브랜디 한잔을 마시고 있다. 그런데 건너편 독일인 손님이 “러시아가 서구에 기여한 것은 보드카뿐이다. 다른 걸 3개 더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보드카 한잔을 사겠다”고 도발한다.

조국 러시아가 무시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로스토프 백작은 분연히 일어나 도전에 응한다. 그는 첫째로 안톤 체호프와 레프 톨스토이라는 양대 문호, 둘째로 표트르 차이콥스키의 발레곡 ‘호두까기 인형’ 1막 1장, 그리고 마지막 신의 한 수로 캐비아(소금에 절인 철갑상어 알)를 제시해 독일인을 굴복시킨다.

미국 작가 에이모 토울스의 장편소설 ‘모스크바의 신사’에 나오는 위트 넘치는 대목이다. 만약 내가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뭐라고 할까 상상해 봤다. 처음 만난 외국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 만한 ‘한국이 아시아에, 혹은 세계에 기여한 세 가지’를 제시하는 것이다. 조국에 버림받아 자살하려던 퇴물 귀족도 저렇게 멋지게 애국심을 펼쳐 보였는데, 나는 한참을 끙끙대며 생각해 봤지만 이거다 싶은 게 하나도 없었다.

한글과 세종대왕, 이순신, 금속활자, 도자기 기술 같은 오래된 유산이 떠오르지만 이들의 존재를 잘 아는 외국인이 얼마나 많을지 모르겠다. ‘한강의 기적’과 삼성전자, K팝은 어떨까. 초고속 경제성장을 뜻하는 한강의 기적은 말 그대로 기적적인 일이다. 하지만 이걸 전면에 내세우면 과거 군사정권의 통치가 통째로 정당화될 수 있기 때문에 현 정부를 비롯한 진보 성향 인사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 삼성전자는 국제적 인지도 면에서는 문제가 없겠으나 리스트에 올리기가 왠지 저어된다. 내세울 문화 자산이 없어서 억지로 고른 느낌이랄까. K팝은 세계인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으니 리스트에 오를 자격이 있다. 다만 문화적 독창성 면에선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다.

한반도 인사 가운데 대외적 유명세로만 따지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상위에 랭크돼 있을 것이다. 물론 그는 선한 주인공이 아니라 빌런(악당)에 가깝다. 그가 어느 날 갑자기 각성해서 비핵화를 단행하고 북한 인민의 번영을 위해 헌신한다면 다시 생각해 보겠지만, 아직은 ‘개전의 정’이 보이지 않는다.

한국이 세계에 기여한 일로 ‘촛불혁명’을 내세울 분들도 있을 것이다. 잘못된 권력자를 시민들이 평화적 시위로 끌어내린, 참여민주주의의 분명한 성취다. 그러나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정권이 실정을 거듭해 촛불의 광휘가 많이 흐려졌다. 요즘이 특히 그렇다.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 이후 서울 서초동과 광화문광장에 나온 수많은 인파는 서로 다른 ‘국민의 뜻’을 소리 높여 외치는데, 이 갈라진 민의를 대통령이 어떻게 듣고 있는지 모르겠다.

“국민들의 우려와 의혹의 목소리를 메아리처럼 되풀이하는 것은 지도자가 할 일이 아니다. 사태의 흐름을 수수방관해서는 안 된다. 그런 우려들을 몰아내는 데 앞장서야 한다.” 싱가포르의 국부로 불리는 리콴유(1923~2015) 전 총리가 한 말이다. 조 장관 사태에 관해 문재인 대통령은 수수방관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통령의 결정에 반대하는 국민을 설득하거나 그들의 분노를 달래려는 노력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대통령의 고집과 여권 지지층이 외치는 ‘조국 수호’의 이유가 잘 이해되지 않아서 몹시 답답하고 혼란스럽다.

호텔 바를 나온 로스토프 백작은 옥상 난간에 올라 “안녕, 내 조국”이라 말하고 막 뛰어내릴 참이었다. 그때 동향 사람인 잡역부 노인이 달려와 난데없이 벌꿀을 권한다. 억지로 먹은 꿀에서 고향의 사과나무 향이 나자 그 순간 백작은 삶의 의지를 되찾는다. 흐려져 가는 나의 애국심도 도로 찾았으면 좋겠다.

천지우 정치부 차장 mogul@kmib.co.kr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