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25일 ‘세계무역기구(WTO) 개발도상국 지위’를 공식적으로 포기한다. 1995년 WTO 자유무역 틀이 갖춰진 지 25년 만이다. 그동안 국내 농업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이 개도국 지위 유지의 근거였다. 하지만 지난해 기준으로 수출액 세계 4위, 국민총소득(GNI) 세계 10위라는 한국 경제 위상과 동떨어진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동안 국제사회의 꾸준한 문제 제기도 있어왔다.
다만 모양새가 좋지 않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압박에 밀려 다섯 번째로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는 국가가 된다.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 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셈이다. 이해 당사자인 농민들과의 대화가 부실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외적으로 급한 불은 껐지만 국내 공감대 형성이라는 큰 숙제도 남는다.
정부는 이날 대외경제장관회의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고 WTO 개도국 지위 유지에 관한 안건을 심의·결정한다. 정부 내부적으로는 더 이상 개도국 지위를 유지하지 않는 쪽으로 결론을 내린 상태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7월 26일(현지시간) 트위터를 통해 한국의 개도국 지위를 문제 삼았기에 퇴로가 없다는 인식이 배경에 깔려 있다. 한국에 앞서 대만 싱가포르 아랍에미리트(UAE) 브라질도 개도국 지위를 포기했다.
앞으로 한국은 개도국이 누리는 혜택을 받을 수 없다. 단, 현재 한국이 받고 있는 개도국 혜택은 한정적이다. WTO가 출범할 때 개도국에 부여한 ‘10년 간 평균 24%의 관세 인하’는 이미 효력이 다했다.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의 중심이었던 농업 분야 혜택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걸 바탕으로 국내 농산물 시장을 고율 관세로 보호하고, 농업계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 수입산 쌀에 513% 관세를 부과하고, 보조금인 고정·변동 직불금을 지급하는 게 대표적 사례다. 앞으로는 이를 줄이거나 없애야 한다.
그렇더라도 당분간 큰 변화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이 받아 온 농업 분야 혜택을 없애려면 다자간 협상 타결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 도하개발아젠다(DDA) 협상이 유명무실해진 2008년 이후 DDA 협상의 재개 가능성은 희박하다. 차기 협상 자체도 불투명하다. 지금 한국이 누리고 있는 혜택을 선제적으로 포기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변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측 불가능한 미국이 문제다. 자국법에 따라 농산물 수입을 압박하는 예외적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농민들이 국가예산에서 농업예산 비중 4~5%로 확대 등 6가지 대책을 요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부는 일단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한다는 방침이다. 농업계 요구를 전적으로 수용할 수 없지만 대안을 찾기로 했다. 김용범 기획재정부 1차관은 24일 농업계 간담회에서 “농업이 갖는 중요성을 안다”며 “WTO 규제에서 보조금에 해당하지 않는 공익형 직불제의 조속한 도입 등에 적극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세종=신준섭 이종선 기자 sman32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