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또다시 미국을 향해 비핵화 협상의 ‘올해 연말 시한’을 강조했다. 북한은 중량급 인사들을 내세워 미국을 압박하는 담화를 연거푸 내놓고 있다. 미국의 ‘새로운 계산법’으로 빨리 협상을 재개하자는 요구로 보이는데, 북한의 조바심이 강하게 느껴진다.
김영철(사진)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은 27일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위원장’ 명의로 낸 담화에서 “미국이 자기 대통령과 우리 국무위원장의 개인적 친분 관계를 내세워 시간끌기를 하며 올해 말을 무난히 넘기려고 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망상”이라고 밝혔다. 김 부위원장은 “최근 미국이 우리의 인내심과 아량을 오판하면서 대조선(대북) 적대시 정책에 더욱 발광적으로 매달리고 있다”며 “제반 상황은 미국이 셈법 전환과 관련한 우리의 요구에 부응하기는커녕 이전보다 더 교활하고 악랄한 방법으로 우리를 고립, 압살하려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미국을 강하게 비난했다. 그는 “조미(북·미) 관계에서는 그 어떤 실제적인 진전이 이룩된 것이 없으며 지금 당장이라도 불과 불이 오갈 수 있는 교전 관계가 그대로 지속되고 있다”고도 했다.
앞서 김계관 북한 외무성 고문도 지난 24일 담화에서 “우리는 미국이 어떻게 이번 연말을 지혜롭게 넘기는가를 보고 싶다”고 밝혔다.
북한은 미국과의 대화 시한이 2개월 정도밖에 남지 않아 ‘연말’이란 시점을 연이어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 4월 시정연설에서 연말을 북·미 대화 시한으로 못 박았다. 시한은 다가오는데 협상에서 진전이 없어 북한이 답답해 하는 모습이다. 박원곤 한동대 국제지역학 교수는 “김 부위원장 담화는 김 고문의 담화보다 거친 표현으로 압박하는 메시지지만 초조함도 드러내고 있다”며 “미국한테 계속 무시당하니 시간이 없는 북한이 말 폭탄 수준으로 압박 강도를 높인 것”이라고 분석했다. 박 교수는 “이같이 압박 강도를 높이는 것은 북한이 실무협상에 빨리 임할 가능성도 높다는 걸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김 부위원장과 김 고문은 둘 다 예전에 미국과의 협상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군 출신의 대미 강경파인 김 부위원장은 당 통일전선부장으로 비핵화 협상에 깊숙이 관여하다 지난 2월 베트남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통전부장에서 해임되고 협상라인에서 빠졌다. 김 고문은 과거 북핵 6자회담 북측 수석대표로 나섰던 베테랑 미국통이다.
북한이 연이은 담화에서 북·미 정상 간 친분을 강조한 것에서는 이른 시일 내에 정상회담을 열어 ‘톱다운’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엿보인다. 최용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안보전략연구실장은 “김 고문과 김 부위원장 담화는 표현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결국 북한이 하고 싶은 말은 ‘미국 측 실무자들은 변화가 없으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결단을 내려 정상회담을 개최하자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편 해외 군용기 추적 사이트 ‘에어크래프트 스폿’에 따르면 미 공군 B-52H 스트래토포트리스 전략폭격기 2대가 지난 25일 대한해협과 동해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B-52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전략핵잠수함(SSBN)과 함께 미국의 3대 핵전력으로 꼽힌다. 이 핵심 전략자산이 한반도 주변으로 전개된 것은 최근 무력시위를 벌인 북한에 대한 경고이거나 군사훈련 범위를 동해 일대까지로 넓힌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견제라는 해석이 나온다.
이상헌 기자 kmpap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