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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섬情談-장은수] ‘핫’은 우리 시대의 정신병이다



우리는 이 공간에서 저 공간으로, 이 물건에서 저 물건으로,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핫’한 것을 찾아서 이동한다. 오래된 것들을 소중히 하고 간직하고 음미하기보다 싫증을 이유로 바꾸고 버리고 폐기하면서 새로운 것들을 한없이 열망한다. 오늘의 화제를 좇으려 ‘실시간 검색어’를 클릭하고, ‘해마다 트렌드’를 확인하는 강박을 표현한다. 그러나 실시간은 대부분 한나절 넘기기 어렵고, 한 해를 넘기지 못하고 바뀌는 것은 트렌드일 수 없다. 실시간은 사실상 조작에 가깝고, 트렌드는 대개가 말놀음일 뿐이다. 잠깐의 이슈에 정신을 쏟을수록 일상은 산만해지고 삶은 방향을 잃어버린다.

인생에서 가치 있는 것들은 전혀 ‘핫’하지 않다. ‘핫’은 비천할 뿐이다. 진짜 소중한 것 중에서 바꿀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평생을 함께할 애인도, 기쁨과 슬픔을 함께할 친구도, 일에 지친 몸을 반기는 아이들도, 마음에 쏙 드는 옷들도, 손에 딱 들어맞는 필기구도, 읽고 또 읽어도 영감을 주는 책도…. 한 번 얻으면 죽을 때까지 함께하기를 바랄 뿐, 아무도 도중에 버리려 하지 않는다.

이른바 ‘신상’이 가치 있는 듯 여기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갖고 싶어 하는 명품은 유행을 이겨낸다. 헌책방에 갈 때마다 놀라는 경우가 많다. 사고 싶은 책일수록 헌책이 새 책보다 가격이 월등히 비싸다. 상품은 사용하는 순간 거의 절반으로 떨어지지만, 명품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가치가 올라간다. 명품에는 시간이 도무지 좀먹지 못하는 고귀함이 있다. 명품은 시간을 이기고, 결국은 불멸에 도전해 문화유산이 된다.

자주 ‘핫’할수록 삶은 천박해진다. 고귀함은 단 하나만 사랑하는 데에서 생겨난다. 단테에게 필요한 연인은 오직 베아트리체만이었다. 아홉 살 때 한 번, 열일곱 살에 또 한 번, 고작 두 차례 마주쳤을 뿐이고, 심지어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었으나 단테의 연인은 그녀가 전부였다. 오직 단 한 사람만 사랑하면서 나날이 사랑의 높이와 깊이를 더해 갔기에 단테는 사랑의 덧없는 격정을 구원의 영원한 기도로 바꿀 수 있었다. 불멸을 품을 때 인간은 고귀해진다. 한순간의 사랑을 영원한 여성으로 고양하는 힘이 있었기 때문에 단테는 ‘새로운 인생’의 참신한 언어와 ‘신곡’의 거룩한 높이를 이룩할 수 있었다. 사랑할 대상을 매번 새롭게 발견하는 게 아니라 한 사람한테서 사랑할 이유를 무한히 발명할 줄 알 때, 사랑은 비로소 위대해진다.

‘핫’은 우리의 삶을 부박하게 만든다. 우리를 어느 하나도 잘 사랑할 줄 모르는 떠돌이로 만든다. 오랫동안 삶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면서 서서히 이룩되는 기억의 두께를 깎아내리고, 관계의 밀도를 성기게 한다. 그러나 익숙한 것만이 우리를 구원한다. 여행 가서 남긴 ‘인생 사진’에는 대부분 인생이 없다. 삶이란 스펙터클이 아니다. 나날이 보는 얼굴들과 같이 써 나가는 일상의 시시콜콜한 에피소드야말로 우리 인생의 진짜 서사다.

새로움이란 무엇인가. ‘익숙한 낯섦’이다. 헛된 유행과 들뜬 광고를 좇아 ‘낡아빠진 새로움’을 구하는 것은 사실 지루함, 즉 공허에 지나지 않는다. 텅 비어 버린 마음을 ‘신상’으로 감추려는 것이다. 계절이 지나기 전에 이 물건이 진부해지고, 한 해가 지나기 전에 창고에 처박히며, 몇 해가 지난 후에는 쓸쓸히 버려질 것이다. ‘핫’은 권태를 부추길 뿐 이길 수는 없으니까. 진정한 새로움은 항상 마주치던 것을 영원히 낯설게 느끼는 일이다. 시인들은 이 일을 해냈기에 위대함을 얻는다. 괴테는 노래한다. “그늘 속에서 보았네/ 작은 꽃 한 송이/ 별처럼 빛나며/ 눈동자처럼 아름다웠네.”

미약하다 해서 빛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작다고 아름답지 못한 것도 아니며, 익숙하다 해서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은 저마다 빛을 품고 있다. 인생이란 그늘 속에 핀 작은 꽃 같은 것이다. 그 꽃에서 빛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힘이야말로 우리 삶에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역량이다. 이 힘이 없을 때, 사람들은 ‘핫’에 휘둘린다. ‘핫’을 좇으면 이 힘이 약해진다. 귀족적인 것은 시간을 이긴다. 제품은 한 계절도 지나지 않아서 시시해지지만, 명품은 세월이 흐를수록 아름다워진다. 삶을 명품으로 만들려면, ‘핫’에서 벗어나라.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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