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권민정] 나그네 환대에 관하여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톰 행크스 주연의 ‘터미널’이란 영화가 있다. 동유럽의 작은 나라에서 미국에 온 주인공이 고국 사정으로 입국이 불허돼 공항터미널에서 생활하며 겪는 이야기다. 그렇게 9개월을 살다가 드디어 터미널 문을 밀고 나가서 뉴욕에 첫발을 디뎠을 때 감격해 하는 주인공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비슷한 일이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는데 정치적 박해를 피해 한국에 온 콩고 출신 앙골라인 루렌도 가족의 일이다. 아이 4명을 포함한 일가족 6명이 인천공항터미널에서 10개월을 노숙인처럼 살았다. 그들이 우여곡절 끝에 난민심사를 받기 위해 터미널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됐을 때 루렌도씨의 9세 된 장남은 “우리도 이제 자유야”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작년 500명이 넘는 예멘인들이 제주도로 입국, 난민 신청을 하면서 사회에 큰 이슈를 던졌고 난민수용 여부에 대한 찬반 논란이 거셌다. 난민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만일 이번에 그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나라에도 난민들이 몰려올 것이고 그들이 일자리도 뺏고, 안전도 해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우리 땅으로 들어오려는 이방인들에 대한 적대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 혐오와 적대는 외국인 노동자, 이주 여성들, 탈북민에게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한국교회협의회는 긴급 성명을 발표하고 “나그네 된 이들과 함께 그들의 고통을 나누며 상생하는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이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창세기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대접하는 장면이 나온다. 몹시 뜨거운 날 장막 입구 그늘에서 쉬고 있던 아브라함은 멀리서 낯선 사람 세 명이 지나가는 것을 본다. 그는 일면식도 없는 그들을 달려가 맞아 물을 가져다 발을 씻게 하고, 떡과 송아지 요리를 해 정성껏 대접한다. 그 결과 아브라함은 1년 후에 사라를 통해 아들을 얻을 것이란 상상도 못 했던 예언을 듣고 축복을 받는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5장에서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하시며,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예수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오늘날 나그네를 환대하는 것은 모험일 수 있다. 낯선 존재,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는 사람을 집안에 들이는 것은 자신의 존재에 위협을 가하는 것이다. 그 나그네가 때로는 도둑질을 하고 심하게는 성폭력, 살인에 이르는 세상이라 경계를 게을리할 수가 없는 형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안전한 집에서 거주하며, 가족과 인생을 향유하기를 원하는데 낯선 사람이 집에 들어오려고 하면 위협을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나에게 익숙하고 안락한 세계를 열고 위험 부담이 있는 낯선 자를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 이유는 그 낯선 자가 헐벗고 굶주리고 가난한 자로,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자로 나에게 찾아오기 때문일 것이다.

고통받는 타자에 대한 환대와 배려야말로 근대윤리학의 핵심이 돼야 한다는 철학자 레비나스는 내 집 문을 꽁꽁 걸어두고 타인으로부터 분리된 채 자기중심주의로 살아가는 것은 책임으로부터의 도피이며 윤리적 의미의 악이라고 말했다. 그 악과 반대되는 차원은 선인데 구체적으로 타인의 호소를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 즉 타인을 영접하는 환대라고 했다.

나그네 환대는 긍휼이며 타인의 고통을 나누어 갖는 것이다. 따라서 환대는 자기희생이 전제돼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의 특징은 이기적인 삶에서 돌이켜 십자가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애굽에서 나그네 되었던 일을 항상 기억하며 살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씀일 것이다. 훗날 내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제가 어느 때 나그네 되신 주님을 영접했습니까” 하고 여쭈었을 때 “바로 네 곁에 있던 나그네를 영접하지 않았느냐”는 대답을 들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다.

권민정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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