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세월도 담아낼 줄 아는 영혼의 마트료시카







현존하는 배우 중에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고, 신뢰하는 배우를 꼽으라면 단연코 전도연이다. 2007년 이창동 감독의 ‘밀양’으로,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아서는 아니다. 개인적으로 1999년 정지우 감독의 ‘해피엔드’를 보았을 때 처음으로 배우 전도연을 ‘발견’했고, 매혹되었고, 감탄하게 되었다. 전도연을 이전에 몰랐던 게 아니다. 광고에서, TV에서, 다른 영화에서 이미 보았던 배우였지만, ‘해피엔드’의 전도연은 아예 달랐다. 아니, 지금껏 한국영화에서 본 적 없었던, 완전히 다른 패러다임의 연기였다. 그녀, 전도연은 영화 속에서 전도연이라는 자연인의 이름, 얼굴, 직업, 개성을 지우고 다른 인물이 되었다. 영화 속 그녀는 남편을 속이고 정부도 이용하는, 그러나 허무의 숲에서 욕망의 부표를 맴도는, 그런 여자였다. 1999년 대한민국 어딘가에 그런 표정을 지닌 채 살고 있을 것 같은 얼굴, 그런 사실감이 연기로 전달되었다.

전도연이라는 사람 안에는 다양한 전도연이 들어있다. 러시아 전통인형 마트료시카를 열면 더 작은 마트료시카가 자꾸 등장하는 것처럼, 전도연의 내부에는 끝도 없이 증폭되는 자아가 있다. 1997년 영화 ‘접속’으로 영화계에 데뷔한 이후 23년 동안 19편의 장편 영화에 출연했다. 그런데 그 작품 안에는 겹친다고 할 수 있는 캐릭터가 없다. 그래서인지 영화 19편에 대한 각각의 기억이 또렷하다. 때로 어떤 배우들은 출연했던 영화들 간에 구분이 잘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미지가 반복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전도연은 하나의 이미지로 수렴되거나 하나의 배역에 머물지 않는다. 평범한 20대 서울 여성(‘접속’), 조폭을 사랑하는 여의사(‘약속’), 순박한 시골 처녀(‘내 마음의 풍금’), 3류 라운드걸(‘피도 눈물도 없이’), 정절을 지키는 전통적 여성(‘스캔들’), 변두리 퇴물 마담(‘무뢰한’)에 이르기까지 영화마다 다양한 캐릭터로 확산한다. 전도연인데, 전도연이 아니다. 전도연의 얼굴은 변화무쌍하다. 어떤 연기라도 결국 자기의 것, 전도연의 것으로 만들어 내는 힘, 전도연의 안에 있는 수많은 전도연 덕분일 것이다.

상상력이 뛰어난 여배우

정지우 감독의 ‘해피엔드’를 찍을 당시 전도연은 20대 중반의 미혼이었다. 하지만 영화 속 최보라는 아이를 둔 유부녀였고, 심지어 결혼 생활에 염증을 느끼는 여성이었다. 과거 연인을 현재의 정부로 두고 대범한 이중생활을 하는 여성. 사실 전도연에게는 이 모든 게 현실이나 경험이 아닌 ‘상상’의 영역일 수밖에 없었다. 결혼도 출산도 외도도 모두 경험 밖의 영역이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전도연은 상상력이 무척 뛰어난 배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배우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 중 하나가 바로 이 상상력이다. 아무리 내면에 수많은 자아가 있다 하더라도, 상상력이 없다면 꺼낼 수가 없으니 말이다.

상상력이란 삶에 대한 논리적 추론이자 분석적 능력이다. 가령, 영화 ‘접속’에 출연할 당시 전도연은 PC통신은커녕 컴퓨터조차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그 정서를 연기한다. 낯선 타인과의 교감이라는 보편적 체험 영역 안에서 비체험의 PC통신, 온라인의 감성 구조를 ‘상상’해낸 것이다. 즉 상상력이란 체험의 영역 안에서 비체험을 재구성하는 과정이자 능력이다.

1999년 전도연이 ‘해피엔드’의 유부녀와 ‘내 마음의 풍금’의 19살 시골 처녀를 동시에 연기할 수 있는 동력도 여기에 있다. 결혼하고 바람을 피우는 아이 엄마나 1970년대 17살이었던 처녀 모두 체험하지 않았던 상상의 영역임에는 똑같다.

전도연이 이 비체험의 영역을 길들이는 과정이 매우 흥미롭다. 박진표 임상수 정지우 등 전도연과 함께 작업한 감독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듯이, 전도연은 시나리오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본다. 형광펜으로 표시하고, 포스트잇을 붙여가며 전도연은 시나리오 속 인물이 되기 위해 다른 것을 하는 게 아니라 작품의 의도를 찾기 위해 표현된 시나리오와 그 여백의 행간에 매달린다.

전도연은 작업을 할 때 감독과 시나리오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말을 여러 번 하곤 했다. 시나리오가 작품이 가진 날것의 의도라면 감독과의 대화는 그것의 현현, 즉 현실화 작업의 중요한 도구이다. 전도연은 결국 연기자가 의존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 시나리오 탐색과 감독과의 대화, 연기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이 두 가지라는 것을 알고, 전도연은 매우 정통한 방식으로 명배우의 길을 가고 있는 셈이다.

여백을 읽을 줄 아는 탐색

데뷔 20주년을 기념해 부천국제영화제가 마련한 전도연 특별전에서, 전도연은 몇 편의 작품을 인생작으로 손꼽았다. ‘접속’이 영화 데뷔작이라서 의미를 지녔다면 다음 작품은 ‘해피엔드’였는데, 전도연은 이 작품을 통해 연기란 단지 감독의 지시를 따르는 게 아닌 감독과 배우와의 끝없는 대화 가운데 탄생한다는 것을 절감했다고 한다. 전도연은 이 작업 이후 연기에 대해 눈을 떴다고 말했는데, 작품들을 봐도 그 말이 입증된다. ‘피도 눈물도 없이’(류승완·2002)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이재용·2003) ‘인어공주’(박흥식·2004) ‘너는 내 운명’(박진표·2005)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 캐릭터, 시대를 선택하며 변화무쌍한 연기 폭을 보여준다.

2007년 이창동 감독의 ‘밀양’은 여러 면에서, 전도연의 말처럼 배우 전도연 연기의 패러다임을 또 한 번 바꾼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전도연은 “‘밀양’을 통해 꾸며서 연기하는 게 아니라 내가 느끼는 만큼만 연기하면 된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한다. 이 말은 한편 전도연이 이 작품을 통해 얼마나 더 많이 느끼는, 깊은 울림통을 가진 배우가 되었는지를 거꾸로 보여준다. 느끼는 만큼 연기하는 것은 시시한 하수는 결코 쓸 수 없는, 대단한 경지이다. 꾸며서 연기하는 게 아니라 느끼는 만큼 연기한다는 것은 결국 배우란 척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배역의 삶을 완전히 이해하고 느껴서 그것을 흘러넘치게 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전도연은 이미 그런 배우가 되어있다.

늘 새로운 ‘메이드 인 전도연’

데뷔작인 ‘접속’의 성공과 ‘약속’의 대중적 흥행 이후 전도연은 사랑 이야기와 멜로 이야기에 안주하는 스타로 살 수도 있었다. 많은 여배우들이 반짝이는 성공작 이후 자신의 아름다운 이미지만을 광고 속에서 반복적으로 소모하는 것처럼, 전도연 역시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도연은 과감히 그 자신의 이미지를 거절하고 배우로서 탈피를 선택해 왔다. ‘밀양’ 이후의 선택 역시 그렇다. 이미 역사적 배우가 되었지만 전도연은 늘 그랬듯 또박또박 다른 삶을 그려낸다. 처절한 하층 계급 여성 인물이었던 ‘하녀’(임상수·2010)의 은이, ‘집으로 가는 길’(방은진·2013)의 정연도, ‘협녀’(박흥식·2014)의 월소도…. 전도연이 만만하게 할 수 있었던, 그러니까 쉬운 선택은 없었다. 전도연은 할 수 있는 연기가 아닌 모든 캐릭터에 대해 염결함을 고집한다. 한겨울 바다에 빠지는 것도, 액션 연기도, 낯선 곳에 감금된 연기도, 바닥을 기며 걸레질을 하는 모습도. 전도연은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해내고자 한다. 연기에 스스로를 헌신하는 것이다.

전도연의 최근작 중 ‘무뢰한’(오승욱·2014)은 그런 의미에서, 전도연의 가치와 매력을 한껏 살린 작품이었다. 사랑을 빌미로 그녀를 힘들게 하는 애인, 외로움을 이유로 그 빈 공간을 파고드는 위장 경찰 사이에서 전도연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 사랑한다고 여기는 것을 위해 스스럼없이 무너져 가는 여자 혜경을 연기했다. 스산하지만 그래서 더 아름답고 처연했던 여자 혜경. 이창동 감독의 말처럼 전도연은 연약하면서 강인하고, 스산하면서도 단정하다.

이 단단한 자아 가운데서 전도연은 언제나 ‘메이드 인 전도연’ 표 영화의 중심에 서있다. 전도연이 출연하면 상대 남성 배우가 누가 되었든 그 작품은 전도연의 영화가 된다. 남성 중심적 한국영화판의 흐름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연이 등장하는 순간 주연은 전도연으로 바뀐다. 상대가 흐릿해지고 전도연이 오롯해지는 것이다. 전도연의 출연작들을 하나하나 되짚을 때나 상대 배우가 새삼스레 떠오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떤 세월도 담아낼 수 있을 배우, 늘 최고를 기대하게 하는 배우, 전도연이다.

<강유정 영화평론가·강남대 한영문화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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