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이 지난 14일 오전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4세. LG의 황금기를 이끈 주역이자 ‘참경영인’으로 재계의 귀감이 돼 온 구 명예회장의 영면에 재계에선 추도가 이어지고 있다.
구 명예회장은 1970년 LG그룹 2대 회장으로 취임한 이래 25년간 ‘도전과 혁신’을 주도했다. 이 기간 LG그룹 매출액은 260억원에서 30조원대로 약 1150배 성장했다. 특히 주력사업인 화학·전자 부문은 물론 부품·소재까지 사업 영역을 확대하며 원천 기술경쟁력을 확보했다.
이는 그가 회장에 오르기 전 20여년간 ‘공장 지킴이’로 일하며 사업 감각을 읽혀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구 명예회장은 럭키 크림 생산을 직접 담당했다. 이사라는 직함에 어울리지 않게 손수 가마솥에 원료를 붓고 불을 지펴 크림을 만들었다. 상자에 일일이 제품을 넣어 포장해 판매현장에 들고 나가기도 했다. 하루걸러 숙직하며 오전 5시 반이면 몰려오는 도매상들을 맞았다.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에 공장가동을 준비하기도 했다.
기술개발의 중요성도 일찍이 강조했다. ‘강토소국 기술대국’ 신념 아래 연구·개발(R&D)에 열정을 쏟았다. 구 명예회장은 “연구소만은 잘 지어라. 그래야 우수한 과학자가 오게 된다”고 했다. 76년 국내 민간기업으로는 최초로 금성사에 전사적 차원의 중앙연구소를 설립했다. “국민 생활 윤택하게 할 제품을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 보자”며 재임 동안 70여개의 연구소를 설립했다.
R&D 강화로 LG의 화학·전자부문 기술 체력은 더욱 탄탄해졌다. 19인치 컬러 TV와 공랭식 에어컨, 전자식 비디오카세트리코더(VCR), 슬림형 냉장고 등을 국내 최초로 잇달아 선보였다. 구 명예회장도 생전에 “70년에 냉장실과 냉동실을 분리한 이중 구조의 ‘투 도어(양문형) 냉장고’를 개발한 것과 74년에 개발한 가스레인지, 77년 19인치 컬러TV를 생산한 것 등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회상했다.
그는 선진 경영 문화의 기틀을 마련한 기업인이었다. 구 명예회장은 국내 민간 기업으로는 최초로 기업을 공개했고, 국내 최초로 해외 생산공장을 설립해 세계화를 주도했다. 70년 2월 그룹의 모체 기업인 락희화학이 민간 기업으로서는 국내 최초로 기업공개를 통해 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곧이어 전자 업계 최초로 금성사가 기업공개를 하면서 주력 기업을 모두 공개한 한국 최초의 그룹이 됐다.
구 명예회장은 국경 없는 국제 경쟁을 예견하고 깊은 위기감을 느꼈다. 그는 그룹의 전면적인 경영혁신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회장 1인의 의사결정에 의존하는 경영체제를 과감하게 벗어던지고 ‘자율과 책임경영’을 내세웠다. 전문경영인의 자율경영체제를 확립하고 ‘고객가치 경영’이란 개념을 도입했다.
합작 경영을 통해 빠른 성장을 일궈내기도 했다. 그는 일본 히타치·후지전기·알프스전기, 미국 AT&T 등 세계 유수의 기업들과 전략적 제휴를 통한 합작 경영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이를 통해 빠른 속도로 선진 기술과 경영 시스템을 습득할 수 있었다. 그는 경영 혁신에 대한 의지를 끝까지 놓지 않았다. 회장직에서 내려오며 남긴 이임사에서도 “혁신은 영원한 진행형의 과제이며 내 평생의 숙원”이라고 강조했다.
구 명예회장은 70세이던 95년 2월, LG와 고락을 함께한 지 45년째 되던 해에 스스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국내 최초의 대기업 ‘무고(無故·아무런 사고나 잡음이 없음) 승계’로 기록되며 재계에 신선한 파장을 일으켰다. 경영진의 세대교체가 필요하다고 결심한 것으로, 이 역시 그의 ‘경영 혁신’에 대한 의지가 반영된 결과다.
은퇴 이후 고인은 자연인으로서 소탈한 삶을 보냈다. 그는 충남 천안 성환에 위치한 연암대 농장에 머물면서 버섯연구를 비롯해 자연과 어우러진 취미 활동에 열성을 쏟았다.
비공개 가족장으로 조용하고 차분하게 치르겠다는 고인과 유족의 뜻에 따라 조문은 범LG가 구씨 일가와 동업 관계였던 허씨 일가, 일부 정·재계 인사에 한해 받았다. 박삼구 전 금호아시아나 그룹 회장과 김쌍수 전 LG전자 부회장, 노기호 전 LG화학 사장 등 전 LG 경영인들이 조문했다.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이 15일 빈소를 찾아 문재인 대통령이 보낸 위로를 유가족에게 전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 이명희 신세계 회장,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도 고인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은 고인에 대해 “이 땅에 산업화의 기틀을 만들었던 선도적인 기업가였다”는 추도사를 발표하고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발인은 17일 오전이다.
최예슬 기자 smart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