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넷이니 얼마나 좋아?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딱 사계절.” 프레드릭이 이야기를 마치자 들쥐들은 박수를 치며 감탄했어요. “프레드릭, 넌 시인이야!” 프레드릭은 얼굴을 붉히며 인사를 하고 수줍게 말했습니다. “나도 알아.” (레오 리오니 ‘프레드릭’ 중에서)
들쥐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 열심히 옥수수와 열매, 밀과 짚을 모을 때 반만 뜬 눈으로 가만히 앉아있던 프레드릭이라는 들쥐가 있다. 열심히 일하던 들쥐들이 프레드릭에게 뭐하냐고 물으면 햇살과 색깔, 이야기를 모은다고 대답한다. 깊은 겨울이 찾아와 모아 놓은 곡식도 사라지고 찬바람만 스며들자 “아무도 재잘대고 싶어 하지 않았던” 들쥐들은 햇살과 색깔, 이야기를 모으는 프레드릭을 떠올린다.
프레드릭은 커다란 돌 위에 올라가 햇살과 색깔, 사계절을 이야기한다. 프레드릭이 들려준 이야기에 마술처럼 생기를 찾은 들쥐들이 “프레드릭, 넌 시인이야”라고 칭찬하자, 프레드릭은 “나도 알아”라고 대답한다.
오래전 읽은 그림책 ‘프레드릭’을 떠올린 건 김소연 시집 ‘i에게’ 발문에 인용된 글을 보고 나서다. 들쥐들과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모은 프레드릭이 강풀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들쥐의 칭찬에 “나도 알아”라는 대답까지 딱 강풀이다.
강풀은 웹툰의 개척자다. 웹툰은 단순히 만화를 인터넷으로 유통하는 인터넷 만화가 아니다. 인터넷에 공유·확산되며 가치를 만드는 새로운 매체다.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인터넷 인프라 확대와 함께 개인 홈페이지에 부정기적으로 한두 컷으로 구성된 만화가 연재되거나, 신문에 연재된 만화가 인터넷에 공유되는 시기를 거쳐 2003년 포털사이트 다음에 ‘만화 속 세상’ 코너가 신설되고, 그해 10월 4일 강풀의 ‘순정만화’가 연재되며 웹툰 시대는 시작됐다. ‘순정만화’의 대중적 성공으로 기존 출판 만화와 구분되는 ‘서사 웹툰’이 나올 수 있었다.
그래서 강풀에 대한 수많은 찬사와 평가가 시작되는 지점은 주로 ‘순정만화’다. 틀린 건 아니지만 ‘순정만화’가 그의 데뷔작은 아니다. 강풀은 2001년 홈페이지를 개설해 일상의 가벼운 해프닝을 그린 웹툰을 연재했다. 황당한 경험을 가볍게 풀어낸 초기 우스개 웹툰은 주로 배설물 소재를 활용하고 있어 당시 ‘엽기’ 유행에도 어울렸지만, ‘내가 말이야’ 같은 1인칭 서사에 기반을 둔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이기도 했다.
대자보에 만화를 그리던 국문과 운동권
강풀 웹툰을 발아시킨 성장의 자양분은 크게 세 개로 구분된다. 첫째, 가족을 통해 발아한 휴머니즘. 둘째, 대자보를 통해 발아한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 방법. 셋째, 진융(金庸 이하 김용)의 무협소설이나 ‘드래곤라자’ 같은 장르소설, ‘삼국지’ ‘장길산’ 같은 대하소설을 통해 발아한 시대에 대한 고민을 담은 스토리텔링.
강풀은 인터뷰 등을 통해 가족을 향한 애틋함을 고백하곤 했다. 2010년 9월 11일 트위터에 남긴 글이다. “아버지는 작은 교회의 목사님이셨다. 작년 칠순을 넘기시면서 목회를 은퇴하셨다. 교회도 작고(기 때문에) 가정형편도 어려웠는데 매일 감사기도를 하셨다. 무슨 기도할 거리가 저리 많으실까. 이러니, 내 어찌 부모님의 믿음을 이어받지 않을 수 있을까.” 이 트윗에서 이어받겠다고 이야기한 “부모님의 믿음”이 그의 작품에서는 “협력해 선을 이루는 이야기”로 구현된다. 그래서인지 강풀 웹툰의 주인공은 모두 착하고, 거대한 장벽과 맞서 싸우며 ‘사람이 희망이다’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국문학을 전공한 강풀은 총학생회에서 홍보를 담당했다. 대자보를 붙이는 게 일이었는데, 아무리 대자보를 붙여도 관심을 끌지 못했다. “글에 그림을 더하면 어떨까 싶어서 대자보에 만화를 그려 메시지를 전달하기 시작했어요. 매직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그림물감으로 색칠을 했죠. 지금 제가 그리는 만화 스타일이 거기서 비롯된 거예요.”(‘레이디경향’ 2011년 3월호)
만화 언어를 선택했을 때부터 강풀은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을 고민했다. 그 고민은 데뷔 이후 지금까지 이어진다. 강풀 웹툰은 여러 캐릭터의 이야기를 시점을 바꿔가며 사슬형 구조로 엮어간다. 각각 다른 캐릭터의 관점에서 하나의 사건을 들여다본다. 그는 여러 인물의 이야기를 구조화해 시점을 바꿔 간다. 독자들은 사슬이 연결되듯 흐르는 구조를 신기하게 바라본다. ‘아! 이 사람은 저 앞에서 나왔던 누구다!’
스릴러나 미스터리 장르에서도 복선을 어렵게 깔지 않는다. 누구라도 서사의 사슬을 쉽게 이어갈 수 있다. 한 회씩 읽고, 한 부를 넘어가면 자연스럽게 서사의 사슬이 이어진다. 난해하지 않은 자연스러움은 강풀이 소통하는 방식이고, 그의 힘이다. 강풀은 항상 전체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연재에 들어간다.
세부의 진실로 장르 판타지에 현실성 부여
‘순정만화’ 이후 ‘브릿지’까지 강풀의 웹툰은 고백하고 지켜주고 싶은 사람에 관한 이야기였다. ‘순정만화’ ‘바보’ ‘그대를 사랑합니다’ ‘당신의 모든 순간’은 삶을 탐구한 작품이었다.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98년 가부장적인 남편으로 살다 암에 걸린 아내를 먼저 보내고 우유배달을 시작한 김만석 할아버지, 달동네 언덕길에서 폐지를 모아 손수레를 끌고 내려오는 송이뿐 할머니가 주인공이었다. 고물상 옆 주차장에는 치매에 걸린 아내를 집에다 가두고 새벽 5시부터 자정까지 주차장을 지키는 장군봉 할아버지도 등장했다. 김만석 송이뿐 장군봉은 예쁘게 포장된 황혼 로맨스의 주인공이 아니라 달동네에서 외환위기 이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 시대의 그 노인들이었다.
출판 만화는 익숙한 캐릭터를 주연으로 등장시키는 스타 시스템을 전략적으로 활용했다. 하지만 강풀 웹툰에는 매번 새로운 사람들이 캐스팅된다. 기획 단계에서 이들에게 각각 이름을 붙이고 ‘그 사람’으로 완성하는 데 공을 들인다. 개성적으로 형상화된 인물들은 다양한 계층의 속성을 효율적으로 드러낸다. 세부적 진실과 함께 전형적 인물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리얼리즘의 특징도 보여준다. ‘그대를 사랑합니다’에서 보여준, 현실에서도 당연히 존재할 노년의 사랑, ‘당신의 모든 순간’에서 보여준, 도시가스 민영화나 이주노동자 문제 같은 당대적 이슈들도 모두 리얼리즘 서사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아파트’ ‘타이밍’ ‘이웃사람’ ‘어게인’ ‘조명가게’로 이어지는 미스터리 스릴러나 ‘무빙’ ‘브릿지’로 이어지는 ‘능력자 액션물’은 리얼리즘과 잘 연결되지 않는 장르물이지만 모든 작품이 삶을 탐구하고 있고, 세부 묘사를 통해 전형적인 인물을 만들어내고 있다. 강풀은 어떤 작품을 하더라도 ‘세부의 진실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능력자가 나와도 그들이 활약하는 건 구체적인 사건을 통해서다. 강풀은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이야기인 ‘26년’ 이후 역사적인 사건을 이야기 발화의 종자로 활용하곤 했다. 가령 ‘어게인’의 경우 첫 번째 출발 지점은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이었다. ‘무빙’이나 ‘브릿지’ 같은 능력자 액션물은 시공간을 거슬러 다니며 당대의 사건들을 만화를 통해 불러냈다. 강풀은 이런 과정에서 세부의 진실을 정교하게 담아내려 노력한다. 세부의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시간의 축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공간을 정교하게 가다듬는다. 이렇게 완성된 공간에서 좀비와 귀신, 능력자들이 움직인다. 세부의 진실은 장르의 판타지에 리얼리티를 부여한다.
세로 스크롤과 서사의 결합
세로 스크롤과 서사를 본격적으로 결합한 작가가 강풀이다. 세로 스크롤은 웹 환경에서는 자연스러웠지만 출판 만화를 중심으로 발전한 기존 만화 연출과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았다. 출판 만화의 연출은 한 페이지 속 정지된 칸의 연속을 통해 시간의 흐름과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칸과 칸의 연결은 물론 칸이 모여 페이지를 만들어내는 조형이 연출의 기본이 된다.
세로 스크롤 웹툰은 고정된 프레임의 설정이 불가능하므로 이전과 같은 칸의 조형이 불가능하다. 강풀은 칸의 조형성을 포기하는 대신 화면을 고민했다. PC나 스마트폰 화면에 어떤 시각정보가 보일까 고민했다. 최대한 혼선을 피하고자 한 화면에 1, 2개의 칸만 허용했다. 반복을 통해 정서와 동세(動勢)를 설명했다. ‘반복’이라는 연출은 지면으로 옮겨졌을 경우 지루할 수도 있지만, ‘스크롤’ 방식에는 효율적이었다. 같거나 비슷한 컷이 늘어나고, 내레이션이 반복돼도 상관없었다. 독자의 스크롤 속도만 빨라질 뿐이었으니까.
웹툰을 통해 데뷔한 ‘웹툰 네이티브’ 강풀은 ‘순정만화’를 통해 ‘스크롤 웹툰’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제안했고, 이런 형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 결과 세로 스크롤 형식은 ‘표준 포맷’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