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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사니] 화성에서 온 북한, 금성에서 온 미국



비핵화 개념 놓고 30년 넘게 동상이몽… 기회 다시 주어지면 주춧돌 마련에 총력을

비핵화(denuclearization) 개념을 둘러싼 북한과 미국의 동상이몽은 북핵 문제가 산생한 때부터 30년이 넘도록 깨이지 않았다. 북·미 양측이 그동안 도출했던 수많은 비핵화 합의들이 하나도 이행에 이르지 못하고 휴지조각이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책 제목에 비유하자면 ‘화성에서 온 북한, 금성에서 온 미국’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을 위시한 서방 국가들이 북핵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사법적이다.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 회원국으로서 핵무기 개발 금지 의무를 지고 있음에도 이를 위반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결의 등 대북 제재는 북한이 국제법을 위반했기 때문에 내려진 정당한 처벌이다. 따라서 제재 해제는 북한이 핵무기를 완전히 폐기해야 가능하다. ‘CVID’ ‘FFVD’ 등 미국의 비핵화 방법론도 이 지점을 논리적 전제로 삼고 있다.

북한은 자신들이 왜 핵무기를 가질 수밖에 없었는지 맥락을 살펴보라고 강변한다. 정치적·역사적 시각이다. 북한은 미국이 수십 년 동안 자신들을 핵으로 위협하며 체제 붕괴를 꾀했기 때문에 부득이 핵무기 개발에 나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미국의 체제 위협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는 결코 핵무기를 포기할 수 없다고 결론짓는다. 대북 제재 역시 북한 경제를 흔들어 체제를 무너뜨리려는 책동이기 때문에 철폐해야 한다.

김정은 체제에서도 이런 기조는 변하지 않았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6년 5월 7차 당대회에서 ‘세계 비핵화’를 주창했다. 김 위원장이 공개 육성으로 ‘비핵화’를 언급한 첫 사례였지만 의미는 간단치 않았다. 미국과 대등한 핵보유국으로서 핵 군축 협상을 하겠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2개월 뒤 정부 대변인 성명에서 “우리가 주장하는 비핵화는 조선반도 전역의 비핵화”라며 “여기에는 남핵 폐기와 남조선 주변의 비핵화가 포함돼 있다”고 확인했다.

한국과 미국이 북한의 요구를 들어주려면 국군과 주한미군이 보유한 첨단 무기를 폐기하고 주일미군과 괌의 전략자산을 미국 본토로 재배치해야 한다. 한반도 유사시를 대비한 유엔사 후방기지 역시 폐쇄돼야 마땅하다. 만에 하나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태평양 전역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급속히 줄어들며 안보 지형이 근본적으로 재편될 수밖에 없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핵 확산 방지 의무를 진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을 감싸고 도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미동맹 입장에서 보면 북한의 요구는 과도하다. 그렇다고 북한은 애초부터 비핵화에 진정성이 없었다며 대화 무용론을 설파하는 것도 온당치는 않다. 북한은 구소련 붕괴와 ‘고난의 행군’ 등 체제 존립 위기를 겪는 동안 오로지 핵무기에만 매달려 왔다. 우리가 한·미동맹을 중시하는 것 이상으로 그들은 핵무기에 의존하고 있다. 저들이 ‘필승의 보검’이라며 꼭 쥐고 있는 핵무기를 내려놓도록 하려면 우리도 귀중한 뭔가를 양보할 각오쯤은 해 둬야 한다.

김 위원장은 2018년 4월 문재인 대통령과 판문점 도보다리에 걸터앉아 대화를 나눌 때 자신이 생각하는 비핵화가 무엇인지 솔직히 털어놨을 것이다. 김 위원장이 여러 계기에 “내 자녀들이 평생 핵을 이고 살기를 원치 않는다”고 언급했다는 얘기도 들려온다. 감성을 건드리는 표현이지만 여기에 현혹돼선 안 된다. 이 말은 자기 주머니에 핵을 넣어둔 채 자녀를 양육하고 싶지 않다는 한가로운 의미가 아니다.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 전역에서 체제 위협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안심할 수 있겠다는 쪽에 더 가깝다.

문재인정부 당국자들이 이 말을 얼마나 새겨들었는지 모르겠다. 김 위원장 입에서 나온 ‘완전한 비핵화’ 한마디를 제대로 곱씹지 않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찾아간 것으로 미뤄 귓등으로 들었던 모양이다. 한 해 남짓 동안 세 번의 남북 정상회담과 두 번의 북·미 정상회담 등 화려한 이벤트가 펼쳐졌지만 비핵화 개념을 둘러싼 간극이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는 진실이 폭로되면서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갈등과 완화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한반도 정세의 특성상 올해 봄쯤 다시 ‘기회의 창’이 열릴지도 모르겠다. 그때가 오면 서두르지 말고 단단한 비핵화 합의를 위한 주춧돌을 마련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주기를 바란다. 총선 정국에 호재가 찾아왔다며 한바탕 쇼를 벌이는 일은 제발 없었으면 한다.

조성은 국제부 기자 jse13080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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