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기생충’의 아이들



우리나라 영화가 세계적으로 눈부신 선전을 보이고 있다. 같은 분야에서 그간 열심히 토대를 쌓아 온 영화인들 못지않게 국민 역시 국제 경기를 보듯 응원하는 축제의 분위기도 느껴진다. 이러한 분위기에 맞춰 풍부한 비평과 의견들이 온오프라인에 쏟아지다 보니 다양한 관점들을 찾아보는 것도 영화 자체와는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그런데 전공이 전공(소아정신과)이다 보니, 영화 속에서 내 시선을 끈 것은 기존의 비평들과는 조금 다른 부분이었다. 스포일러를 피해 간단히 언급하자면, 영화의 중심인 두 가정 모두에서 겉으로 보이는 것 이면의 현실을 정확하게 깨달은 캐릭터는 가장 나이 어린 구성원들이었다. 다른 가족들은 어린 그들이 깨달음에 따라 보이는 모습들을 ‘증상’으로 대하거나 무시했지만, 가장 어린 이들만이 다른 모두가 진실을 놓치고 하루하루를 넘길 때, 그 위태하고 복합적이며 불안한 상황을 말로 표현하지는 못해도 피부로 느끼고 꿰뚫어 보았다.

불안이라는 것은 논리보다 직관적이고 동물적인 감정이다. 영화 속 엄마는 몇 년 지난 일에도 여전히 눈물을 쏟을 만큼 아이를 아끼면서도 막상 일상에서는 피부를 맞대고 아이를 안아주지 않는다. 반면 비록 거짓된 자리일지언정 다른 가정의 가장 나이 어린 이가 그 어린이를 품어주었고, 어린이는 엄마 대신 그 사람에게 안겨 불안을 나눈다. 영화 속에서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아이들은 ‘탄광 속의 카나리아’ 역할을 한다. 과거 광부들이 유해가스에 가장 연약하고 민감한 카나리아를 탄광 속으로 데려가서 새의 반응을 보고 위험 여부를 판단했던 것처럼, 아이들의 모습은 가족과 사회의 단면을 가장 먼저 반영하여 그대로 보여준다. 그 신호를 놓치고 아이의 불안정을 그저 ‘증상’으로만 치부하며 다른 이들은 그와 무관한 양 지낼 때, 수면 아래 가려져 있던 불균형과 문제는 점점 커져 걷잡을 수 없어진다. 현실의 사회에서도 연일 가장 어리고 약한 아이들의 소리 없는 고통과 비명의 뉴스가 끊이지 않는다. 카나리아가 살지 못하게 된 곳에서 다른 이들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우리 사회의 어른들이 출산율만을 따지며 아이들을 안전하게 품어주지 않는다면 말이다.

배승민 의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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