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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선껌으로 시작 123층 월드타워까지… ‘거인’의 족적

사진=연합뉴스




19일 별세한 고(故) 신격호(사진) 롯데그룹 명예회장은 한국과 일본 양국에 걸쳐 식품·유통·관광·석유화학 분야 대기업을 일궈낸 ‘대한해협의 경영자’였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1967년 롯데제과를 세운 이후 유통업계가 성장할 수 있도록 밑거름을 만들고 시장을 키워온 경제 성장의 선구자였다.

신 명예회장 별세에 대해 전국경제인연합회는 논평을 내고 “대한해협의 경영자라는 별칭만큼 한·일 양국 간 경제 교류에 힘써주신 신 명예회장의 타계는 우리 경제의 큰 아픔과 손실”이라고 했다. 중소기업중앙회는 “불모지였던 국내 유통산업을 개척해 중소기업 판로 확대에 기여하고 서비스산업 발전에 큰 획을 그은 분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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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명예회장의 자수성가 일대기는 성실과 열정으로 요약된다. 1921년 10월 4일(음력) 울산에서 5남 5녀 맏이로 태어난 신 명예회장은 42년 부관 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가진 것은 없었지만 배움에 대한 열망으로 우유배달 등을 하며 와세다대(화학 전공) 학비를 벌었는데,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한 일본인의 눈에 띈 게 ‘기업가 신격호’의 첫걸음이 됐다.

신 명예회장은 44년 일본인 투자자 하나미쓰의 투자(5만엔)를 받았다. 전쟁 중 두 차례 공장이 폭격되는 어려움을 겪었으나 좌절하지 않고 재기에 성공했다. 허물어진 군수공장에서 비누를 만들며 다시 일어선 그는 껌 사업으로 성공을 거뒀다.

미군의 일본 주둔으로 껌의 인기가 커지자 기회를 알아봤고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사업을 키웠다. 껌 소비 타깃을 어린이로 보고 대나무 대롱과 풍선껌을 함께 포장해 판매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변변한 장난감이 없던 시절 풍선껌과 대롱에 ‘즐거움’이라는 가치를 담은 것이다. 신 명예회장의 사업적 감각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다.

풍선껌의 인기는 신 명예회장의 사업 기반을 마련해줬다. 자본금 100만엔, 종업원 10명의 법인사업체를 만들고 ‘롯데’를 세웠다. 롯데라는 이름은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여주인공 샤롯데에서 따왔다. ‘정열이 있으면 어떤 어려움도 즐겁게 이겨낼 수 있다’는 신 명예회장의 ‘베르테르 경영철학’이 담긴 이름이다.

신 명예회장은 67년부터 기업보국(企業報國)을 기치로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모국의 경제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마음으로 한·일 수교에 따라 국내 투자가 가능해지자 롯데제과를 세웠다. 70년대 인수·합병을 통해 롯데칠성음료, 롯데삼강(현 롯데푸드)으로 식품사업을 확장했다.

신 명예회장은 유통업 근대화와 관광업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6년여 동안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에 맞먹는 1억5000만 달러를 투자한 롯데호텔이 73년 문을 열고, 3년여 동안 준비한 롯데쇼핑센터(현 롯데백화점 본점)는 79년 12월 완공됐다. 롯데호텔은 미국 러시아 베트남 등 해외 주요 지역에 진출했고 롯데쇼핑은 국내 최대 유통기업으로 자리를 잡았다.

국내 최고층 롯데월드타워도 신 명예회장의 숙원사업 중 하나였다. 82년 ‘제2롯데월드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롯데물산을 설립하고 88년 서울시로부터 부지 8만6000여㎡를 사들였다. 하지만 최종 건축 허가 승인은 2011년에야 이뤄졌다. 건물 완공 후 2017년 4월 그랜드오픈까지 30년을 기다렸다.

신 명예회장은 기간산업 투자에도 뜻이 있었다. 제철 사업에 관심이 있었으나 국영화 방침으로 희망을 접어야 했다. 하지만 79년 호남석유화학을 인수하면서 중화학 사업 진출에 성공했고, 이후 국내외 주요 유화사를 인수하며 현재 글로벌 화학기업으로 도약했다.

롯데를 재계 5위 그룹으로 키웠지만 녹록잖은 말년을 보내야 했다. 2015년 장남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과 차남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경영권 분쟁을 겪으면서다. 이 가운데 신 명예회장은 신 전 부회장과 뜻을 함께하면서 한·일 롯데그룹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떼야 했다. 경영권 갈등이 불거진 가운데 정신건강 문제도 드러나 어려움을 겪었다.

신 회장과 신 전 부회장은 신 명예회장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했다. 이날 오후 두 사람은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진 빈소를 굳은 표정으로 오갔다.

유족으로는 부인 시게미쓰 하쓰코 여사와 장녀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 장남 신 전 부회장, 차남 신 회장, 사실혼 관계인 서미경씨와 딸 신유미씨 등이 있다. 신춘호 농심 회장, 신경숙씨, 신선호 일본 식품회사 산사스 사장, 신정숙씨, 신준호 푸르밀 회장, 신정희 동화면세점 부회장이 동생이다.

문수정 이택현 기자 thursda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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