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김모(43)씨의 중학교 2학년 딸은 한 남성 아이돌그룹의 4년 차 열성 팬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팬질’을 해온 딸은 용돈을 모아 개당 3만원이 넘는 공식 응원봉 등 ‘굿즈(상품)’와 앨범을 사고 각종 팬미팅과 콘서트에 간다. 아이돌 문화가 낯설지 않은 김씨 부부는 딸의 팬 활동을 제한적이나마 금전 지원해왔다. 팬클럽이 아니면 공연 예매에서 밀린다고 해 유료 가입도 해줬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유행으로 공연·팬미팅이 연달아 취소되면서 딸의 팬 활동은 그나마 잠잠해진 편이다.
역시 중학교 2학년인 이모(14)양도 같은 아이돌의 팬이다. 아무리 힘들 때라도 좋아하는 아이돌의 얼굴만 보면 금방 기분이 좋아진다. 이양은 지난해 겨울 용돈을 모아 팬미팅에 몰래 다녀왔다가 아빠에게 들켜 집 밖으로 쫓겨나기도 했다. 한 달 동안 휴대전화를 정지당하고 용돈까지 끊겼지만 이양은 ‘덕질’을 끊지 못했다. 이양은 최근 아빠를 졸라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를 결제하는 데 성공했다. 이른바 ‘음원총공(좋아하는 아이돌의 음원 순위를 높이기 위해 팬들이 한꺼번에 특정 곡을 스트리밍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다. 이양은 “‘최애(최고로 좋아하는 아이돌)’가 상을 받아 행복해하면 나도 행복하다”고 말했다.
10대 팬들이 아이돌 시장에서 ‘큰손’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동안은 두꺼운 팬층에 비해 실질적 구매력은 미미한 수준이었지만 최근 급격하게 소비가 느는 양상이다. 국민일보가 최근 예스24로부터 제공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5년만 해도 한 해 관람객 규모 상위 5개 아이돌 콘서트에서 10대 예매 비율은 전체 3.1%에 불과했으나 이후 매해 꾸준히 늘어 지난해 15.6%까지 급상승, 아이돌 시장의 주요 소비층인 30대를 끝내 제쳤다. 1순위인 20대의 65.3% 다음가는 비중이다. 정부 통계상 같은 기간 10~19세 인구가 80만명가량 줄어든 걸 고려하면 더욱 의외의 결과다.
이 같은 현상은 현재 30~50대 초반인 ‘X세대’가 부모 세대에 편입되면서 자연스럽게 확산되고 있다. 김씨는 “같은 세대 부모들은 이미 팬 문화를 겪어봐서 자녀들의 팬질을 그리 낯설게 여기지 않는다”며 “딸의 주변 친구 가정을 봐도 예전처럼 부모가 자녀를 무조건 막아야 된다는 생각은 덜하다”고 말했다. 다만 김씨는 “예전에는 팬이라고 해봐야 대부분은 대개 1년에 한두 번 정도 콘서트 가는 게 전부였지만 지금은 행사도 워낙 많고 공개된 정보도 많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1990년대 이후의 대중문화에 익숙한 이들이 자녀들의 팬 활동을 예전보다 폭넓게 지원하거나 함께한다는 설명한다.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현 30~50대 초반 부모들은 (현대적 의미의) 대중문화를 경험한 세대”라며 “공연에 대한 이해도 높고 아이돌 문화에 대한 거부감도 없어 자녀 세대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공연장에 같이 가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2000년대 초반에 비하면 사회 전체적으로도 팬덤 문화를 향한 시각이 변했다”면서 “부정적 의미였던 ‘팬덤’이란 단어 자체도 중립적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다만 아이돌 산업의 확장과 청소년 문화의 소멸이 맞물린 현상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이 교수는 “아이돌 산업이 10대를 공략하기 위해 비교적 접근성 높은 상품과 공연을 내놓은 영향도 있다”고 봤다. 이어 “예전 같으면 청소년들이 염색이나 교복 개조, 문신 등 주류문화가 아닌 반항적 수단으로 자신을 표현했지만 이제는 아이돌 문화를 소비함으로써 스스로의 취향을 표현하는 것”이라며 “‘청소년 문화’가 사라진 공백을 주류 ‘어른 문화’가 그대로 메우고 있다”고 분석했다.
최윤진 전 중앙대 청소년학과 교수는 “정도만 지나치지 않는다면 팬덤 문화는 자신의 취향을 적극 실현한다는 면에서 충분히 청소년기에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최 교수는 “같은 아이돌의 팬끼리 공동체로서 함께 행동하고 소비로써 개인의 의사표현을 하는 것도 자아에 좋은 경험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