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의병 아버지 “나라 사랑해라”… 아들은 삼애 정신 실천했다

경기도 고양시 중산로 연세대 삼애캠퍼스 내 삼애교회. 캠퍼스는 독립운동가이자 기독교농촌계몽운동가인 배민수 목사가 세운 삼애농민기술학원 부지로 1976년 유족 등이 농업발전에 써달라며 연세대에 기증했다. 2006년 설립된 삼애교회는 배민수기념관을 겸하고 있다.
 
배민수 목사 (1896~1968)
 
고양 연세대 삼애캠퍼스 내 삼애교회 뒤편 배민수 목사 부부 묘.
 
서울 회현역 3번 출구 앞 성도교회. ‘남산 신궁’ 예배당에서 이전한 자리다.
 
배민수 목사가 설립한 서울 성도교회 1주년 기념사진. ‘남산 신궁’ 건물 일부를 예배당으로 사용했다. 성도교회 제공
 
일제강점기 함북 성진군 성진읍 제동병원 그리어슨 선교사(앞줄 가운데)와 병원 스태프(위). 배민수는 1919년 3월 초 이 병원 등을 중심으로 성진 3·1 만세운동을 주도한다. 아래 사진은 김책시(옛 성진읍) 학성역 모습이다. 유관지 목사 제공



 
삼애농민기술학원 일과 시간표.


1967년 배민수 목사는 당시 경기도 고양군 중면에 삼애농업기술학원(삼애학원)을 설립한다. 1918년 ‘조선국민회’ 사건과 1919년 함북 성진 3·1만세 시위로 두 차례나 옥살이를 한 배민수였다.

1920년 7월 10일. 배민수는 함흥 감옥을 출옥하면서 기도했다.

“하나님, 지금까지의 기도는 고통을 덜어 달라는 나약한 기도였지만 더는 고통 때문에 기도하지 않겠습니다. 쉽고 넓은 길을 택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주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르겠습니다. 주님의 길로 인도하소서.”

그는 출옥 후에도 만주 용정, 평양, 미국 등에서 광복 투쟁을 계속했고 1950년대 대전에 기독교육농민학교·기독교여자농민학원 등을 설립해 민족계몽과 복음화에 앞장섰다. 전 국민의 8할이 농민이던 시절이었다. 1928년 평양의 독립운동가 조만식(1883~1950) 선생 등과 기독교농촌연구회를 조직, 별세 직전까지 기독교농민운동에 앞장섰던 그였다.

남산 ‘조선신궁’ 예배당 만든 목사

대전 농민학교 출신 주경덕 목사(안양 대영교회 원로)는 “‘하나님, 농촌, 노동을 사랑하자’는 삼애(三愛) 정신이 그분의 처음과 끝”이라고 회고했다. 주 목사는 1959년부터 고양 삼애농장에서 농민운동을 했다.

그 고양 삼애학원은 현재 연세대 삼애캠퍼스로 불린다. 1976년 삼애학원 재단이사회가 배민수의 유지를 받들어 18만5000㎡(5만6000평) 땅을 연세대에 기증했다.

지난달 말 찾아간 고양시 중산동 삼애캠퍼스. 고봉산 자락 그 너른 캠퍼스는 소위 ‘고양 일산’ 프리미엄을 톡톡히 누리고 있었다. 아파트로 둘러싸인 캠퍼스 용지는 개발만 되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판이다. 캠퍼스 내에 천문대, 축구·야구장, 초교파 삼애교회 등이 자리잡고 있다. 동네 주민의 산책 코스이기도 하다. 2006년 설립된 삼애교회가 캠퍼스 내 묵상 길을 다듬어 놨다. 그 코스에 십자가 표지석과 함께 배민수 부부의 묘소가 있다.

서글픈 이야기. 이 땅은 기증 초기만 낙농학과 실습장으로 활용되는 등 유지를 이어받았으나 언제부턴가 흐지부지됐다. 연세대는 지난해 용지매각 등을 교육부에 신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교계에서 “배 목사의 정신을 훼손하는 행위”라는 지탄이 나온다. 연세대는 홈페이지 등에도 삼애캠퍼스를 드러내지 않고 있다. 매각을 둘러싼 갈등이 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주일인 지난 1일 서울 회현역 3번 출구 앞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소속 성도교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 전염을 우려해 주일예배가 유튜브 영상으로 대체됐다. 대예배당과 부속건물 모두 문이 굳게 닫혔다. 1950년 6월 바로 이 자리에서 예배당 정초식을 했으나 6·25전쟁 발발로 예배를 올리지 못한 이래 처음 있는 예배 중단이었다.

성도교회는 1947년 6월 미국 매코믹신학교를 졸업하고 매칼레스터대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배민수에 의해 설립됐다. 그는 월남한 평양 교인을 중심으로 서울 서대문 피어선신학교 교실을 빌려 성도교회를 출범시켰고 몰려든 성도들 때문에 수용이 더는 힘들자 남산 ‘조선신궁’ 부속건물로 성도교회를 이전했다. 그리고 이마저도 좁아 미 군정으로부터 자금을 얻어 새 예배당 정초식을 할 수 있었다. 그 성도교회가 남대문시장을 배경으로 지금까지 이어왔다.

배민수의 예수 정신은 ‘삼애학원’과 ‘성도교회’ 이 두 현장에 배어 있다. 그는 하나님의 땅을 지키려는 믿음으로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의병父 “예수님이 나라 사랑 원하신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큰 시위가 있었다는 소식이 성진(현 김책시)에도 전해졌다. 함경도 성진 함흥 원산 등은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로 개화된 도시였다. 앞서 배민수의 아버지 배창근(1867~1908)은 대한제국 청주감영 진위대 출신 의병이었다. 선교사 밀러 영향으로 예수를 믿었다. 하지만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의병으로 봉기, 체포돼 서대문형무소 교수대에서 생을 마감했다.

사형 집행을 앞둔 아버지를 열두 살 소년이 마지막으로 면회했다.

“아들아 세 가지만 부탁한다. 첫째 너 자신을 잘 돌보아라, 둘째 어머니를 잘 모셔야 한다, 셋째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우리의 조국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도 네가 나라를 사랑하기를 원하실 거다.”

배민수는 아버지의 이 유언을 1946년 4월 ‘누가 그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라는 자서전에 남겼다. 미국 뉴욕에서였다.

그는 아버지가 사형당한 후 평양 숭실학교로 진학해 1915년 노덕순·김형직과 단지혈서 서약으로 항일조직 ‘대한국민회 조선지부’를 결성했고 1918년 1월 고향 청주에서 체포됐다.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1894~1926)은 당시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미션스쿨 명신학교 교사로 있었다.

배민수는 이듬해 2월 8일 석방됐다. 그때 가족이 성진에 이거해 있었다. 그리고 한 달여 만인 3월 초 성진 장날 성진 욱정교회 강학린(1885~1937) 목사 등과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다시 체포됐다. 어머니도 함께였다. 독립운동가 강 목사는 가수 강수지의 증조부다.

배민수 강학린 서채영은 장날 시위자 최고형인 1년 6개월의 형을 받았다. 수인번호 228 배민수. 함흥교도소에 갇힌 그들은 죄수복을 입고 선로를 까는 노역을 했다.

‘(감옥에서) 우리는 하루 두 번 기도회를 했다. 성경을 읽고 공부할 시간도 많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다른 죄수들과 찬송가를 부르고 복음을 나눴다. 내가 풀려날 때 5명이 성경책을 보내 달라고 부탁했고 나는 그것을 전해주었다….’(회고록 중)

그 배민수가 생각하는 ‘왕국’.

“당신 미쳤수? 여기가 지옥이나 마찬가지인데 찬송을 흥얼거리며 행복해 보이니 하는 소리요. 대체 무슨 일이요?” 어느 죄수가 그에게 물었다.

“그렇소. 나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에 늘 행복하오. 당신도 예수를 믿으면 언제나 행복할 것이요.”

약력

1912년 평양 숭실학교 입학
1918년 대한국민회 활동 주도 투옥
1919년 3·1 만세운동 주도 투옥
1926년 조만식 선생 등과 농촌계몽운동
1931년 미국 매코믹신학교 입학
1936년 만주 용정에서 문재린 등과 독립운동
1938~1941년 미국 전역 순회 설교
1947년 미 군정 군속 (서울 성도교회 설립)
1955년 금융조합연합회장
1957년 대전 기독농민학교 설립
1967년 삼애농업기술학원 설립
1993년 부친 배창근과 함께 건국훈장 애국장 수훈

고양=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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