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완·박인하의 만화는 시대다] 10대의 불완전함과 아름다움에 공감하다

이빈 작가. 필자 제공
 
이빈 작가는 기성세대는 이해 못 할 비범한 캐릭터를 앞세운 만화들을 연달아 발표하며 10대들의 큰 지지를 받았다. 특히 여성 독자들은 대하 서사 위주의 1990년대 여성만화계에 등장한 작가 특유의 유머러스함과 일상성을 사랑했다. 사진은 ‘패리스와 결혼하기’. 필자 제공
 
‘안녕, 자두야’. 필자 제공
 
‘MANA’. 필자 제공




1988년 11월, 최초의 여성만화전문잡지 ‘르네상스’가 “여성 만화지 특유의 개성과 순수한 이미지, 우리 주변의 이야기를 다룬 명랑한 순정, 로맨틱하며 우아한 순정”을 내세운 ‘하이틴용 만화잡지’로 창간됐다. 1980년대 만화방용 여성만화가 장편에 적합한 대서사를 담았다면, ‘르네상스’는 타깃 독자들이 선호하는 일상적이고 밝은 만화를 주로 연재했다. ‘르네상스’ 창간호가 매진될 정도로 인기를 끌자 여성만화의 가능성을 확인한 다른 출판사들이 앞다퉈 순정만화잡지를 창간했다. 이런 잡지 창간 붐으로 동호회 활동 등을 통해 준비된 신진 작가들이 대거 데뷔했고, 그렇게 1990년대 여성만화의 황금기가 시작됐다.

여성만화 황금기를 이끌다

1991년 ‘르네상스’ 7, 8월호에 ‘나는 깍두기’를 발표하며 데뷔한 이빈(50) 작가는 90년대 여성만화 황금기를 이끈 대표작가다. ‘르네상스’는 1989년부터 1991년까지 3회에 걸친 신인 작가 공모를 시행하고, 만화동호회에서 활동한 작가를 직접 발굴하며 신진 작가들을 적극 영입한다. 당시 데뷔한 이강주(55) 김지윤(54) 김은희(52) 우양숙(51) 강모림(51) 이빈·유시진(49) 등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 20대 여성 작가들은 이후 여성만화의 스펙트럼을 폭넓게 확장한다.

이빈은 데뷔 이후 1991년 ‘르네상스’ 9월호 영화 패러디 특집에 ‘지존무상2’를 발표했고, 1992년 2월호에 단편 ‘16년 차이’를 발표한다. 불과 몇 개월 후 1992년 7월호부터 ‘Friends’ 연재를 시작하며 1990년대 여러 잡지에 쉼 없이 작품을 연재한다. 중단편을 제외한 주요 장편 연재작만 골라도 1993년 잡지 ‘칼라’의 ‘포스트 모더니즘 시티’, ‘미니’의 ‘쌍둥이와 해결사’, ‘투유’에 ‘마지막 사람들’이 있다. 또 1994년 ‘댕기’에 ‘틴에이지 팬클럽’을, 1995년 ‘윙크’에 ‘Girls’, ‘이슈’에 ‘Crazy Love Story’를, 1996년 ‘미르’에 ‘불완전한 사랑’, ‘화이트’에 ‘포스트 모더니즘 시티’를, 1997년 ‘파티’에 ‘안녕, 자두야’, 1999년 ‘이슈’에 ‘ONE’, 2002년 ‘윙크’에 ‘개똥이’, 2005년 ‘윙크’에 ‘MANA’, 2010년 ‘파티’에 ‘패리스와 결혼하기’를 연재했다.

이빈이 꾸준히 만화를 연재하며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은 요인으로 2가지 요소가 꼽힌다. 첫째, 10대 독자들이 공감하는 ‘일상성’과 ‘웃음’이다. 대하 서사나 로맨스에 집중했던 1980년대 여성만화와 달리 이빈은 10대 독자들의 일상을 유머러스하게 담아냈다. 대표적인 작품이 ‘Girls’다. 1화 ‘사이코 하이스쿨’로 시작한 이 만화는 “드센 여자애들”이 아니라 “너무 정의파고, 페미니스트들일 뿐”인 환상여고 2학년 7반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을 담는다. 뻔뻔한 카리스마 캐릭터 부반장 김화정, 무섭게 생긴 외모 때문에 불량한 학생으로 오해받는 (사)무라이 김미영, 땡땡이나 도시락 까먹기 등 자질구레한 말썽을 부리는 사차원 캐릭터 람바다 신혜진, 전형적인 모범생에 마음 약한 꼬마 반장, 외국에서 전학 온 왕공주 박수지까지 독특한 캐릭터의 주인공들이 벌이는 해프닝이 낯설지 않다.

1970~80년대 명랑만화가 초등학생 주인공들의 일상적 해프닝을 그린 장르라면, ‘Girls’는 10대 여성 독자들의 일상적 이야기를 그렸다. 하지만 공동체를 파괴하지 않는 비도발적인 웃음을 그린 명랑만화와 달리 ‘Girls’는 드센 정의파에, 패미니스트인 여성의 해프닝을 보여준다. 웃음이라는 옷을 입었지만, 일상의 선을 넘는 주인공의 도발을 보며 당대 독자들은 “정말 내 동창 같다”고 느낀다. 선을 넘는 파괴적 쾌감을 공유하며 여성 서사 또한 확장된다. 이빈은 ‘Girls’뿐 아니라 거의 모든 작품에서 이런 코드를 빼어나게 활용한다.

둘째, 10대 독자들이 선호하는 비주류적 취향을 능숙하게 녹인다. 이빈은 1970년에 태어나 도시에서 성장했다. 한국에서 1970년을 전후해 태어난 세대, 특히 도시에서 성장한 세대는 만화·만화영화·가요·팝송·드라마·영화와 같은 대중문화를 본격적으로 즐긴 세대다. 이빈도 작품 소재로 대중문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 특히 록음악 같은 대안적 취향을 작품 소재로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Friends’에는 록 밴드 ‘도어스’와 리더 짐 모리슨이, ‘마지막 사람들’에는 도쿄 하라주쿠의 펑크 밴드가, ‘틴에이지 팬클럽’에서는 ‘니르바나’, ‘홀’ 등 얼터너티브 록 밴드의 음악이 등장한다. ‘ONE’은 음악천재 원음파가 주인공인 이야기로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에 편입된 대중음악을 그린다. ‘포스트 모더니즘 시티’는 록 음악에 무당과 요괴라는 퇴마 장르의 요소를 접목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1990년대 만화에서 쉽게 다룰 수 없었던 젠더 문제도 만화에 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단편 모음집인 ‘불완전한 愛’과 ‘메리 튜즈데이’에서는 다양한 젠더를 지닌 인물들이 등장한다. 과잉과 풍요의 시대였던 1990년대적 특징을 지닌 캐릭터가 대거 등장하는 이빈 만화는 당대 독자들, 특히 10대 독자들에게 열광적 지지를 받았다.

10대, 이토록 카리스마 넘치다니

이빈은 문하생을 거치지 않고 동호회를 통해 만화에 입문했다. 중학교 3학년 때 아마추어 동호회 ‘결’에 가입해 습작을 시작했다. 1990년대 잡지-단행본 시스템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한 이빈은 1970~80년대 만화가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확대된 창작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이빈은 작품에서 반항하고, 파격적인 일탈을 보여주는 10대를 자주 묘사했는데, 당시 만화에서는 10대의 반항과 일탈을 묘사하기 어려웠다.

반면 이빈은 기성세대의 눈으로 보기에 비정상적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만화를 연재했다. ‘크레이지 러브 스토리’의 경우 제목처럼 주인공들이 모두 ‘크레이지’하다. 전교 1등이지만 상습적인 도벽에 기행을 저지르는 혜정이나 온갖 치장을 하고 다니는 지미, 맹목적으로 혜정을 쫓아다니는 성무나 혜정을 질투하고 성무를 좋아하는 ‘날나리’ 보나를 보면 한 명도 평범한 캐릭터가 없다. 작가는 파격적인 캐릭터를 통해 10대가 겪는 내면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일상적인 해프닝을 다룬 ‘Girls’, 록을 좋아하는 무당이 주인공인 퇴마물 ‘포스트 모더니즘 시티’, 10대 천재 가수를 다룬 ‘ONE’, 일탈과 파격의 10대를 그린 ‘크레이지 러브 스토리’, 10대 스쿨밴드 이야기를 다룬 ‘틴에이지 팬클럽’ 등에서 작가는 줄곧 10대를 묘사한다. 작가가 그린 10대는 주어진 틀 안에서 서로 연애하고, 감정을 나누는 캐릭터가 아니라 주어진 규범과 한계를 흔들고 파괴했다. 이빈이 그린 거칠고 파격적인 10대는, 동시대 함께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틴에이지 장르물인 이은혜 이미라의 만화와 비교하면 특징이 더 명확하다. 이은혜 이미라의 만화가 감미로운 발라드라면, 이빈의 만화는 자주 소재로 빌린 록 음악처럼 도발적이다.

이빈이 그린 10대 주인공들은 규범과 한계를 파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기 삶의 주인으로 성장해간다. ‘틴 에이지 팬클럽’에서는 사생아로 버려져 미국에 입양된 진영이나, 부모의 이혼으로 한국에 남겨진 준영이 나름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이빈은 ‘틴 에이지 팬클럽’ 단행본에서 “10대라는 것은 많은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도 10대가 가진 가장 큰 매력은 불투명성을 띤 미래에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방황의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무한대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도 한 것”이라며 10대들에게 연대의 의지를 드러냈다.

이빈은 2020년 현재 장기 연재작 ‘안녕, 자두야’의 작가로 유명하다. 하지만 1990~2000년대 이빈은 10대 여성 독자와 최전선에서 만나 파격의 서사로 함께 연대했던 작가다. 이빈은 문제적 10대를 그리며, 자신의 주인공이자 자신의 만화를 사랑한 10대 독자들을 향해 “우리는 불완전하지만 아름답다”는 메시지를 건넸다. 그리고, 또 그래서 그 시절을 통과한 많은 독자가 이빈을 기억하고 있다.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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