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삶에 고비가 찾아온다. 그 어두운 터널을 통과할 때 한 줄기 빛처럼 도움을 주는 ‘키다리 아저씨’가 있었으면 하는 꿈을 꾸곤 한다. 도움이 절실한 이웃들에게 수술비나 학비, 생활비를 전해주는 이가 있다면 인권 보호의 사각지대에 내몰린 이들을 변론해주는 이도 있다. 지난 20일 광주의 한 카페에서 ‘키다리 아줌마’ 김예원(39) 변호사를 만났다.
그는 공익 변호사다. 장애인·여성·아동 인권침해 사건의 피해자들을 변호한다. 책상엔 법률 지원이 이뤄지기 애매하거나 소위 ‘답 없는 사건’으로 분류된 서류들이 가득하다. 이날도 그는 장애인 의뢰인과 1시간 넘게 전화 상담을 한 뒤 분주한 걸음으로 약속 장소에 들어섰다.
“사건을 들여다본 뒤 당사자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확인하고 직접 지원하거나 가까운 거리에서 지원할 수 있는 기관을 연결해 줍니다. 초기엔 중증 장애인을 많이 만났는데, 최근엔 사회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경계성 장애인을 더 자주 봅니다. 사회가 민감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사각지대를 놓치기 일쑤죠.”
김 변호사가 공익 변호사의 길로 들어선 계기는 사법연수원(41기) 당시 신우회 활동이었다. 법을 선한 도구로 활용하는 크리스천 법조인으로서 미래를 그려 갔다. 연수원을 마친 그는 2012년 법무법인 태평양의 공익재단법인 ‘동천’에 입사해 주로 장애인 인권침해 사건 피해자를 대리했다. 사건들은 곪을 대로 곪은 상태였고, 초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2년 후 서울시 장애인인권센터로 자리를 옮겼다. 이번엔 정해진 관할지, 장애로 국한된 영역이 마음에 걸렸다. 결국 지역과 분야에 상관없이 도움이 절실한 이들을 돕기 위해 3년 만에 또 결단을 내렸다. 그렇게 비영리 1인 법률사무소인 장애인권법센터의 첫발을 뗐다.
수임료는 일절 받지 않는다. 오히려 의뢰인을 만날 때마다 주머니가 가벼워진다고 한다. 의아했지만, 김 변호사는 “당연하다”고 했다.
“지원이 필요해도 먼저 말을 꺼내기 힘겨운 이들을 만나야 하니까요. 활동비는 주로 강의 연구 집필 등으로 마련하죠. 가출 청소년 만나 순댓국 한 그릇, 햄버거 한 입 먹으면서 사건 얘기, 사는 얘기하는 ‘소확행’을 느끼기엔 충분한 재정입니다. 남편에게도 ‘반찬값, 공과금의 절반은 내가 책임진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고요.”
‘안정된 삶’을 내려놓고 소외된 이들을 돕겠다는 소신을 지켜 온 김 변호사 곁엔 쉽지 않은 결단이 필요할 때마다 그를 지지해 준 동반자가 있다. 연수원 동기로 만나 신앙을 함께 키워 온 남편 강지성 판사다. 김 변호사는 “가정 안에서 부부는 건축으로 치면 ‘기초 공사’에 해당한다”며 “날것 그대로를 서로 보여주면서도 신앙을 바탕으로 신뢰하며 ‘티키타카’가 이뤄지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감사하다”며 웃었다.
세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 장애인권법센터장, 정신장애인권연대 이사 등 10개가 훌쩍 넘는 역할을 수행하는 ‘슈퍼 우먼’으로 살아가면서도 그는 사회복지사, 성폭력전문상담원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소송의 승패를 떠나 사건 당사자의 상황을 깊이 이해하고 그들이 스스로 삶을 일으키도록 조력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를 하나씩 갖추자고 생각했다.
그도 장애인이다. 출생 당시 의료사고로 한쪽 눈을 잃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두 눈으로 세상을 보는 이들보다 더 넓고 깊다. 장애인의 탈시설을 전문적으로 돕는 국가기관의 부재, 장애등급제 폐지의 현실적 보완 등 최근 관심을 둔 사안들을 얘기할 땐 두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김 변호사는 교회 내 성평등 문화 정착을 지원하는 기독교반성폭력센터 운영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그는 “집중적 권력구조가 있는 곳에선 인간적 나약함이 악함으로 발현되기 쉽다”면서 “사건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고민하기보다는 문제를 예방하고 교회의 건강성을 회복하기 위한 민주적 소통의 장을 마련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다음 달 5일 ‘제30회 일가상 시상식’에서 청년일가상 수상자로 선정돼 사회공익부문의 션(노승환) 정혜영 부부, 농업부문 강창국 다감농원 대표와 함께 시상대에 오른다. 수상에 대해 “과분하다”며 손사래 치던 김 변호사는 담담하게 삶의 목표를 전했다.
“원대한 계획보다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채워나가는 것, 삼남매가 좋은 시민으로 자랄 수 있게 양육하는 것, 공익을 변호하는 일에 오래오래 몸담는 것입니다. 너무 원대한가요.”
광주=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