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롬 파월(사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이 지난 27일(현지시간) 잭슨홀 미팅에서 공개한 ‘평균물가목표제(AIT)’는 발표 시기가 갑작스럽다는 점 외에는 그간 금융시장과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충분히 예상됐던 것이다. 채권수익률상한제(YCC)나 마이너스금리제도는 부작용 때문에 도입에 회의적이었다는 사실이 지난 7월 미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속기록에서 확인된 터였다. 따라서 금리를 더 이상 내릴 수 없는 통화정책의 한계가 드러난 상황에서 물가라도 자극해보겠다는 고육책 외에는 남은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연준은 통화정책 목표를 변경한 배경으로 인구 감소, 고령화, 생산성 둔화에 따라 잠재성장률이 2012년부터 2019년까지 2.5%에서 1.8%로 하락한 점을 들었다. 또 자연실업률(완전고용 상태에서의 실업률)도 같은 기간 5.4%에서 4.1%로 하락했음에도 인플레이션은 2% 목표치를 밑도는 등 실업이 물가에 미치는 영향이 현저히 줄어들었다고 밝혔다. 인플레를 용인해도 경기가 우려스러울 정도의 과열로 치닫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연준이 새로 도입키로 한 AIT는 물가상승률이 과거 2%에 미달한 만큼 미래에는 2%를 초과해도 일정 기간 이를 용인하겠다는 것이다. 그동안은 경기 호전 등으로 2% 근접 조짐이 보일 경우 선제적으로 정책금리를 올리는 방식이었지만 앞으로는 과거에 2%에 미달한 부분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금리 수준을 묶어놓겠다는 것이다. 연준이 2012년 물가상승률 목표치를 2%로 정한 이후 지난해까지 평균 개인소비지출(PCE) 물가지수 상승률은 1.4%로 2%에 한참 미달해 있다. 식품과 에너지를 제외한 근원물가지수도 1.6%에 머물러 있다. 박성우 DB금융투자증권 연구원은 “근원물가지수를 기준으로 평균물가 산출 소급 시점을 3년 전인 2017년으로 적용한다고 가정하면 내년부터 전년 동기 대비로 매월 2.5%의 상승률이 계속돼야 2023년 말 평균 2%에 도달한다”며 “연준이 구체적 평균물가 산출 방식을 공개하지는 않았으나 매우 오랜 기간 꾸준히 높은 물가 수준이 지속돼야 한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연준의 목표대로 인플레를 자극해 경기를 살려낼 수 있을지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매월 2.5% 수준을 맞추려면 근원물가지수 평균치 1.6%에서 0.9% 포인트나 끌어올려야 한다. 개발독재 국가처럼 계획경제 수준의 무리수를 두지 않는 한 사실상 불가능한 수치다. 오히려 연준이 지난 3월 이후 두 차례 금리 인하와 자산 매입 등을 통해 수조 달러의 통화를 쏟아부었지만 지난 6월 현재 물가지수는 1%가량으로 더 떨어져 있다.
이는 연준이 코로나19를 극복하기 위한 통화 완화정책이 실물 부문에서 수요를 진작하는 불쏘시개 역할에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는 방증인 셈이다.
최근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의 리카도 카발레로 교수는 ‘통화정책과 자산가격 오버슈팅’ 연구서에서 코로나19 위기 국면에서 자산가격(주가 등)을 일정 수준으로 높이는 ‘오버슈팅’을 유발하는 것이 연준의 최적정책이라고 진단했다. 이렇게 높아진 자산가격은 시차를 두고 수요를 증진시켜 실물경제 회복을 가속화는데 최근 금융시장과 실물경제 간 단절 현상은 최적정책으로 인한 일시적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같은 금융과 실물 괴리 현상이 오래 지속될 수 있다는 조짐도 보인다. 그동안 회복세를 보이던 소비심리는 8월 들어 다시 냉각되고 있다. 지난달 콘퍼런스 보드 소비자신뢰지수가 84.8로 경기 충격이 가장 심했던 지난 4월(85.7)보다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4개월째 상승세를 보이던 자동차와 가전제품 등 내구재 구매의향 비율도 다시 떨어진 것으로 나타나 전형적인 불황형 소비 패턴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2010년대 이후 지속되고 있는 저물가 현상이 4차산업 혁명 등 신기술이 야기한 착시일 수도 있어 연준의 인플레 유도 정책이 자칫 자산 버블만 심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이은택 KB증권 연구원은 보고서에서 4차산업 혁명의 가속화로 물가지표 산정에 포함되는 항목들의 상당 부분이 구경제 품목들로 이뤄져 있어 물가에 반영되지 않고 있음을 지적했다. 그는 “웬만큼 경제가 좋아지고 돈을 풀어대도 ‘신경제’ 중심으로 소비가 이뤄진다면 ‘구경제’ 중심으로 구성된 물가는 상승하지 않을 것이며, GDP 성장률도 시원치 않게 나올 것”이라며 “이것이 바로 ‘자산가격 버블의 씨앗’”이라고 지적했다.
무디스의 거시정책 담당 수석연구원인 라이언 스위트는 블룸버그통신 인터뷰에서 인구 변화와 신기술이 물가상승률을 저지할 것이라며 연준의 새로운 인플레 정책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자칫 통화량만 늘어나고 소비와 투자는 정체되는 유동성 함정에 빠지는 일본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
연준의 통화정책 변화는 앞으로 경기부양 주도권을 정부로 넘기기 위한 차원이라는 해석도 있다. 박성우 연구원은 “연준은 실질금리를 낮게, 금융 환경을 완화적으로 유지시켜 정부가 마음껏 재정을 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한 발 물러선 것”이라고 진단했다.
다만 실업률과 관련한 연준의 정책 변화만큼은 코로나로 심화된 경제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한 첫발을 뗀 것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통화정책 결정 기준을 “완전고용 수준으로부터의 괴리”에서 “완전고용 수준에 미달하는 고용 수준”으로 바꾼 것이 그것이다. 원하지 않은 인플레 상승이나 정책목표 달성을 방해하는 위험요인이 없다면 완전고용 수준 이상으로 고용을 확대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실업률이 높은 흑인과 히스패닉 등 저소득층에 더 많은 고용 기회를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불평등 완화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미 의회가 그동안 지속적으로 통화정책을 통한 양극화 해소 방안을 요구했는데 연준이 처음으로 내놓은 구체적 답변인 셈이다.
금융전문기자 d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