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회개한 바울처럼… 삶으로 가난한 이웃을 품다

무등산 국립공원 입구에서 1시간 남짓 걸어 올라가면 만나는 오방수련원. 호남 영맥을 잇는 오방 최흥종 목사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전후 걸인과 결핵·한센씨병 환자를 거두어 보살피던 산속 예배당이었다. 이 수련원은 현재 종교화해와 소통 모임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무등산 증심사 위 신림기도처(현 오방수련원) 초가 앞에서의 최흥종 목사(오른쪽).
 
유진 벨과 조선 청년들을 교육했던 최흥종. 광주 숭일학교 옛터 기념석과 교정 향나무다.
 
옛 광주제중원. 최흥종이 나환자와 결핵환자를 구제했던 곳이다. 광주 기독간호대학 자리다.
 
1962년 전남대생들과 함께 한 최흥종(앞줄 왼쪽 두 번째)과 함석헌(뒷줄 중앙) 선생.
 
조선장로회 광주선교부였던 양림동에 자리한 ‘오방최흥종기념관’. 선교사묘역 옆이다.
 
최흥종 (1880~1966)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예수가 공생애 전 사탄의 유혹과 싸운 대목이다.

오방 최흥종. 한평생을 빈민구제와 독립운동 그리고 복음 전파로 산 영원한 자유인이다.

그는 시장통 깡패, 의병 잡던 순검으로 살던 가엾은 영혼이었다. 예배당 첨탑에서 뛰어내릴 듯한 호기를 부리고 그걸 이생의 자랑삼아 남을 괴롭히며 사는 망나니였다. 그런 그가 예수를 만나 근대 호남 정신의 뿌리가 됐다. 사회사업가, 교육가, 시민운동가, 독립운동가, 영성가 등으로 불렸지만 그가 무겁게 받아들였던 직분은 ‘장로·목사’였다. 호남의 첫 장로였고, 평양신학교를 나온 엘리트 목사였다. 당대 사람들은 ‘예수에 미친 사람’ ‘기인(奇人)’으로 불렀다.

지난 달 중순. 광주 무등산 증심사 계곡 옛 신림교회를 찾아가는 길은 가쁜 숨을 다스리며 몇 번씩이나 쉬어가야 했다. 이 깊은 계곡에 사찰이 아닌 교회가 있다는 것 자체가 의심될 정도로 고됐다. 무속이 행해지던 곳에선 영적 전쟁을 겪곤 했는데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찰 옆이라고 했는데 뭐에 홀린 듯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오방수련원’. 옛 신림교회는 리모델링돼 이 현판을 달고 계곡과 등산로 사이에 아담하게 자리했다. 현판 글씨는 고 신영복 교수(성공회대)의 서체였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증심사 계곡은 사하촌이자 도시 빈민의 주거지였다. 이곳 토막집과 초가에서 결핵과 나병(한센병) 환자들이 살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 신림교회는 오방에 의해 1950년 ‘신림기도처’로 출발했다. 오방수련원 3.3㎞ 아래 신림교회가 위치한다.

오방은 마치 사울과 같은 삶을 살다 1909년 봄 의료선교사 포사이드(1873~1918)가 나병 환자를 거두는 것을 보고 회심했다. 광주선교부는 오웬 선교사가 전남 동부 지역을 순회 목회하다 폐렴에 걸려 광주로 후송된 후 사경을 헤매자 목포에 있던 포사이드에게 SOS를 쳤다. 그는 조랑말을 타고 광주로 향했다. 한데 광주 길목 16㎞ 지점쯤에서 피고름에 얼룩져 버려진 한 여인을 보게 됐다. 포사이드는 이 여인을 말에 거두어 광주에 도착, 안아 내렸다. 깡패로 소문난 오방이 이 장면을 보고 하늘의 음성을 듣게 됐다. 톨스토이 명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미하일이 깨달은 ‘사랑’의 목격이었다. “피고름 철철 나는 저 여인을 안아 내리다니….”

오방은 유진 벨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광주제중원(현 광주기독병원)에서 나환자 치료 등을 도우며 그리스도의 참사랑을 실천했다. ‘1912년 광주군 봉선리교회가 설립되다…우월순(윌슨)이 나환자 20여인을 산속에 집합하고 의약으로 치료할새 선교사와 제중원 사무인 최흥종과 이만준 등이 전도하여 신자를 얻어…’(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중)

이때 성녀 서서평(셰핑·1880~1934) 선교사 등이 오방과 함께했다. 영적 동지였다.

오방은 상속받은 광주 봉선리 땅 330㎡(1000여평)를 나환자 치료를 위해 기증했다. 지금의 여수 애양원의 시작이었다. 이 땅은 새어머니의 구박 속에서도 효자라고 소문날 정도로 섬기고 결국 새어머니를 예수 믿게 한 뒤 벌어진 하나님의 선물과 같은 기증이었다. 3·1 독립만세운동으로 서울에서 1년 2개월간 옥고를 치른 오방. 새어머니가 면회를 왔다. 애증으로 오방은 펑펑 울었다. 토지 기증한 것을 칭찬하는 어머니가 돼 있었다.

오방은 마음에 예수가 심어진 후 ‘효심’ ‘애국’ ‘이웃’이 기독교 가치의 본질임을 깨달았다. 성경을 읽을수록 신행일치 되지 않는 신앙은 헛껍데기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 힘으로 나라를 되찾아 자랑스러운 조국을 물려 줍시다. …나는 만세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멀리 광주에서 왔습니다. 여러분 저를 따라 모두 파고다공원으로 갑시다.” 오방은 정의, 긍휼, 믿음을 돌판에 새겼다.

집사 장로 신학생 등을 거쳐 목사가 된 그는 광주북문밖교회(현 광주중앙교회) 담임으로 광주YMCA 설립, 노동공제회 및 신간회지회 창립, 한국나환자근절협회 창설 등 사회적 활동에 앞장섰다. 시베리아 선교사, 제주 모슬포교회 목사 등도 역임했다.

그러나 1935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노골화되자 이에 협조하는 한국교회에 실망해 호를 오방(五放)이라 칭했다. 오방은 가정에 방만, 사회에 방일, 경제에 방종, 정치에 방기, 종교에 방랑한 자신을 탓하는 사망통지서였다. 그리고 무등산 계곡에 은거하며 나환자와 걸인 돌보는 일에 전념한다. 성직자로 초연한 삶을 살았다. 해방 후 김구·이승만이 건국운동 참여를 권유했어도 가난하고 병든 자들의 친구로 남겠다며 토막기도처 ‘오방정’(현 오방수련원)에서 기도와 구제에만 힘썼다.

“북문밖교회에 갔을 때…탈속한 전형적인 성직자 최흥종 목사는 나환자들에게 은혜로운 벗이 되어서 구라 사업에 전력을 다하셨다.”(근대 소설가 박화성)

“오방, 그는 결코 기인이 아니다. 하나님 말씀에 충실한 기독교인으로 세속인 눈에 기인으로 보였을 뿐이다. 그는…영감과 에너지를 주었다.”(시인 신경림)

“오방은 마치 간디의 모습 같았다.…광주공원에서 오방 사회장이 엄수되었을 때 수많은 나환자와 걸인들이 ‘아버지, 우리는 어쩌라고 가십니까’ 울부짖는 것을 보고…감동적인 장면이 오래도록 내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소설가 문순태)

광주·전남 어디를 가도 그의 수고가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제주, 서울, 시베리아 등도 순례지이다. 지역사회가 광주 양림동에 ‘오방최흥종기념관’ 등을 세워 그의 정신과 영성을 기리고 있다. 그 산속 오방수련원은 종교화해와 소통 모임 공간으로 쓰이고 있었다.

최흥종 연보

·1905년 대한제국 경무청 순검
·1907년 유진 벨로부터 세례
·1919년 3·1운동 참여 수감
·1921년 평양신학교 졸업
·1920년대 광주중앙교회, 모슬포교회 목회
·1930년대 나환자근절협회 창설 및 병자·빈민 구제운동
·1945년 조선건준 전남지회장
·1948년 삼애학원 설립 통해 농촌지도자 양성
·1950년대 나환자·결핵환자 위한 호혜원·송등원 설립
·1966년 금식 100여일 후 별세·사회장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광주=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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