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피플] 해방 후 첫 한국 선교사로 아시아·태평양 성서 보급에 헌신 최찬영 선교사

최찬영 선교사가 지난해 11월 미국 LA 인근 시민공원에서 열린 손자의 결혼식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결혼식은 코로나19로 야외에서 열렸고 사진은 최 선교사의 제자인 윌리엄캐리국제대학원 임윤택 교수가 촬영했다. 임윤택 교수 제공
 
최찬영 선교사가 지난해 미국 LA 월드미션대학교에서 특강에 나선 모습. 임윤택 교수 제공


화상통화 연결음이 울리고 잠시 후 스마트폰 화면에 백발에 푸근한 미소를 지닌 노신사의 얼굴이 나타났다. 95세 고령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정했다. 2시간 넘는 인터뷰 중에도 초인종이 울리면 방문객을 맞이했고 전화벨이 울리면 전화를 받았다.

“내일 우리 마을 사람들이 코로나19 백신을 맞아요. 방금 체온을 확인하러 왔네요.” “올해 ‘황금기 선교사’를 임명하는데 서류에 제 사인이 필요해 직원이 찾아왔어요.” “제자가 안부 전화를 했어요.”

노신사는 바로 ‘해방 후 첫 한국 선교사’ ‘아시아인 최초의 태국과 라오스 성서공회 총무’ ‘아시아인 최초의 세계성서공회 아시아태평양지역 총무’ 등 유독 ‘최초’라는 타이틀이 많이 붙은 최찬영(95) 선교사다.

지난 20일 화상으로 만난 최 선교사는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주 LA 킹슬리메노의 프론트 포치 은퇴자 마을에 살고 있다. 이곳에는 은퇴자 250여 가정이 있다.

1926년 평양에서 태어난 최 선교사는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하며 자연스레 신학교에 입학했다.

“감리교신학교에 다니던 47년 서울에 장로회신학교가 세워진단 소식을 들었어요. 감리교신학교 학생증을 반납하고 48년 장로회신학교에 들어갔어요. 아버지가 장로셨던 제겐 당연한 일이었죠.”

곧 6·25전쟁이 터졌다. 최 선교사는 “태평양전쟁부터 6·25전쟁까지 다 겪었다. 사선을 넘나드는 순간을 여러 번 경험했다”고 말했다. 6·25전쟁 발발 초기엔 공산군에 잡혀가 죽을 고비를 넘겼다. 군목으로 사역하던 52년엔 타고 있던 트럭이 3m 절벽 아래로 굴렀다. 숱한 고비가 끝나니 예상치 못한 도전이 찾아왔다.

“55년 2월쯤 장로교총회에서 우리 집을 찾았어요. 총회가 해방 후 첫 선교사를 태국에 보내기로 했는데 누군가 저희 부부를 추천했답니다.”

그때까지는 선교사의 길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결혼 2개월 차였고 홀어머니와 어린 형제들도 돌봐야 했다. 미국 유학도 준비 중이었다. 주어진 고민의 시간은 단 하루. 밤새 아내와 이야기를 나눈 끝에 “선교의 길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이듬해인 56년 6월 태국에 도착한 최 선교사는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온 선교사’라는 걸 실감했다.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66달러로 태국(139달러)의 절반에 못 미쳤다. 미국 선교사들이 태국어를 배우도록 학비를 대줬고 집은 태국교회에서 마련해 줬다.

약소국 출신이라는 핸디캡을 넘어서니 해야 할 역할이 생겼다. 태국과 라오스의 성서공회를 거쳐 78년부터 92년까지 세계성서공회 아시아태평양지역 총무로 일하며 약 15억권의 성서를 배포하는 데 기여했다.

은퇴 후엔 선교사로서 제2의 삶을 이어갔다. 미국 풀러신학교에서 5년간 연봉 1달러 교수로 후학을 길러냈고 2009년엔 미국 LA또감사선교교회를 통해 선교사로 파송받았다. 선교지는 한국이었다. 부인 김광명 선교사가 고국행을 제안했다.

“의사였던 아내는 제가 선교사의 길을 간다고 했을 때도 말없이 따르며 의사선교사의 삶을 살았어요. 저한테 해방 후 최초의 선교사라 하는데 아내도 최초의 선교사죠.”

고국으로 돌아와 부산 해운대에 터를 잡은 최 선교사는 전 세계에서 활동 중인 선교사들을 돌봤다. 하지만 2013년 부인의 건강이 나빠져 자녀가 있는 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부인 김 선교사는 3년 전 세상을 떠났다. 미국에서는 ‘황금기 선교사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실버 미션은 은퇴한 사람들이 선교사로 헌신한다는 뜻이죠. 사역의 전문성과 생활의 자립기반을 갖춘 이들이 가장 귀한 것을 주님께 드린다는 의미에서 실버보다 골드(황금)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황금기 선교사로 이름 지었어요.”

풀러신학교 제자였던 선미니스트리 대표 김정한 선교사와 함께 2017년부터 ‘황금기 선교사 운동’을 시작해 지난해까지 100명의 황금기 선교사를 임명했다. 인터뷰 도중 사인한 서류도 16명의 황금기 선교사를 임명한다는 내용이었다.

스스로를 황금기 선교사라 칭하는 최 선교사는 코로나19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후배 선교사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넸다.

“사선을 넘나드는 순간을 여러 번 경험했어요. 그 경험은 제게 신앙훈련 영성훈련 선교훈련이었습니다. 선교는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예수님이 최초의 선교사이십니다. 예수님께 내 생각과 계획을 맡기고 주님의 뜻과 지혜를 발견하는 기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서윤경 기자 y27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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