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억새가 옆으로 누워 춤을 춘다. 안개가 서서히 걷히면 부드러운 능선이 윤곽을 드러낸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였다, 가렸다 하는 숲은 신비롭기만 하다. 제주 애월읍 새별오름을 동틀 녘에 오르면 이런 풍경을 만날 수 있다. 한라산이 형성된 뒤 땅속 마그마가 이곳저곳 솟구쳐 생겨난 오름은 화산지형인 제주에만 있는 경관이다. 어떤 것은 봉긋하고 어떤 것은 뾰족하며 산처럼 큰 것도 있고 언덕처럼 작은 것도 있다. 모두 368개. ‘1일 1오름’ 하더라도 1년에 다 오르지 못한다.
모양과 크기와 생태가 제각각인 오름 여행은 제주를 즐기는 방법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1시간 이상 올라야 하는 오름도 있지만, 아부오름 금오름 백약이오름 같은 것은 몇 분이면 정상에 도착한다. 쉬엄쉬엄 걸으면 되도록, 인위적 개입을 최소화한 등산로가 오름마다 조성돼 있다. 아이를 데려온 가족부터 배낭을 짊어진 오름꾼까지 다들 설레는 걸음으로 그 길을 걷고 있었다.
오를수록 빠져드는 오름의 매력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느껴지는 ‘걷는 즐거움’과 오를 때마다 풍경이 달라지는 ‘보는 즐거움’에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다채로운 숲길은 뜨거운 여름에도 시원하다. 삼나무숲에서 마주치는 바람은 이마의 땀방울을 스러지게 하고, 하늘로 쭉쭉 뻗은 편백나무 숲길에선 그 높은 끝을 올려다보느라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다. 부드러운 곡선의 정상은 사방으로 트인 시야가 압권이다. 정상의 능선과 분화구는 오름마다 다양한 매력을 뽐내는데, 남원읍 물영아리오름은 분화구에 습지가 형성돼 파란 하늘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지난봄부터 몇 차례 찾아가 렌즈에 담은 오름은 제주의 변화무쌍한 자연을 간직한 보물 같았다. 그곳에서 건진 한 컷 한 컷은 ‘인생 사진’의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였는데,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었다.
제주=사진·글 서영희 기자 finalcut0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