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두상달 (22) 향락의 카페 골목… 믿음의 형제들과 거리 정화 나서

방배동 카페 골목에 각종 유흥업소가 가득하던 시절 모습.


1989년 음란과 퇴폐, 향락과 폭력이 지배하는 거리가 있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그 시절 방배동 카페 골목이 그랬다.

500명이 넘는 ‘삐끼’들이 호객을 했고 수시로 범죄가 일어났다. 당시 방배동에 살던 동료 집에 강도가 들었던 일이 있었다. 동료 가족은 이사를 하기로 마음 먹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나와 또 다른 방배동 주민까지 믿음의 형제 3명이 모여 성시화 운동의 일환으로 동네를 변화시키기로 뜻을 모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초대교회 교인들은 세상을 뒤집었는데 죄악에 밀려 믿는 사람이 이사를 하여서야 되겠냐”며 의기투합했다.

이사를 하려고 했던 사람은 당시 지검장이던 전용태 장로였다. 나머지는 나와 정정섭 전 기아대책기구 이사장이었다. 지역의 13개 교회 목사님도 초청해 함께 거리를 정화했다.

사실 목사님들의 고민도 컸다. 새벽기도 마치고 나오면 삐끼들이 다가와 “물 좋은 데 있다”며 유혹하는 게 다반사였다.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모임의 이름을 ‘우리 동네 기도회’로 정했다. 청년들도 다수 참여했다. 매주 전도용 회보를 만들어 지역의 업소와 주민에게 나눠줬다. 주말 새벽이 되면 50여명이 빗자루를 들고나와 동네 청소도 했다. 모일 때마다 기도하고 구호를 외쳤다. 찬송 242장 ‘황무지가 장미꽃같이’를 개사한 캠페인 송도 힘차게 불렀다. 점점 카페 골목에서 변화가 느껴졌다. 문을 닫는 술집이 생겼고 그 자리에 일반식당이나 의상점, 편의점이 대신 들어왔다.

90년 말 정부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자 유흥업소들이 철퇴를 맞았다. 당시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김승연 강력부장이 나를 만나자고 했다. 범죄와의 전쟁에 성과를 내야 하는데 방배동 카페 골목 정화 캠페인을 모델로 삼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좋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부장 검사님. 경찰이 단속 나오기 전 정보가 미리 셉니다. 구청과 경찰이 모두 한통속입니다”라고 호소했다. 그러자 평검사 한 명을 방배동 골목에 상주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실제 이 일로 방배동 유흥가의 먹이사슬에 큰 균열이 생겼다.

KBS 방송에도 방배동의 상황이 소개됐다. 91년 걸프전쟁이 발발하면서 국제 유가가 요동쳤다. 정부가 10시 이후 네온사인을 켜지 못하게 했고 심야 영업도 금지했다. 담배꽁초나 오물을 버리는 이들에게 벌금도 물렸다. 우리에게는 기쁜 일이 연속해서 일어난 셈이다. 설상가상으로 이듬해 까페골목에 홍수가 났다. 한 번도 그런 일이 없던 곳이었다. 이 일로 지하에 있던 유흥업소들이 모두 침수됐고 결국 무더기 폐업으로 이어졌다. 업주들은 울상이었지만 우리는 장화를 신고 거리로 나와 싱글벙글 웃으면서 걸어 다녔던 기억이 생생하다. 결국, 방배동 골목에서 유흥과 향락을 자취를 감췄다. 이 운동은 2006년까지 지속했다.

교회가 가까이에 있는 지역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무력한 상태에 머문다는 건 정말 슬픈 일이다. “주여. 지역교회들을 통해 범죄형 거리가 건전한 기독교 문화거리로 변하게 해 주소서”.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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