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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거목 '광장' 최인훈 별세…향년 84세

4개월 전 대장암 말기 진단받고 투병하다 숨져
'광장' 205쇄 찍은 기념비적 작품…문학 교과서 최다 수록

 
23일 별세한 최인훈 작가. [연합뉴스]

소설 '광장' 등으로 한국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작가 최인훈이 23일 오전 10시 46분 별세했다. 향년 84세.

지난 3월 말 대장암 말기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 경기도 고양시 명지병원에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1934년(공식 기록은 1936년) 두만강변 국경도시 함북 회령에서 목재상인의 4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일제강점기하 식민지 교육을 체험했고, 해방과 더불어 밀어닥친 소련군 진주로 함경남도 원산으로 온 가족이 강제이주를 당했다. 이어 고등학교 재학 중인 1950년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부산행 해군함정에 몸을 실어 월남했다.

전란 중인 1952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해 6학기를 마쳤으나 전후 분단 현실에서 공부에 전념하는 데 갈등을 느끼고 1956년 중퇴했다. 이후 군에 입대해 6년간 통역장교 등으로 복무했고, 1959년 군 복무 중 쓴 단편소설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와 '라울전(傳)'을 '자유문학'지에 발표하며 등단했다.

이듬해 4.19혁명이 있고 7개월 뒤인 1960년 11월 '새벽'지에 중편소설 '광장'을 발표했다. 이 소설은 발표 직후부터 문단 안팎에 적지 않은 파장을 가져왔고, 전후 한국문학의 지평을 새롭게 연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되며 60년 가까이 꾸준히 사랑받았다. 출간 이후 현재까지 통쇄 205쇄를 찍었고, 100만부 넘게 팔린 것으로 추산된다.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 최다 수록 작품이라는 기록도 보유한다.

고인은 자신의 대표작 '광장'에 대해 "4·19는 역사가 갑자기 큰 조명등 같은 것을 가지고 우리 생활을 비춰준 계기였기 때문에 덜 똑똑한 사람도 총명해질 수 있었고, 영감이나 재능이 부족했던 예술가들도 갑자기 일급 역사관이 머리에 떠오르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광장'은 내 문학적 능력보다는 시대의 '서기'로서 쓴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작가로서 완벽주의를 추구하며 '광장'을 수차례 다듬는 데 공들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초판 이후 9차례나 고쳐 총 10개의 판본을 냈다. 내용을 일부 바꾸는 등 굵직한 개작만 해도 5차례에 달한다. 한국문학사상 가장 많은 판본을 지닌 작품으로 꼽힌다.   

'광장'을 필두로 그는 이데올로기가 대립하는 분단 현실을 문학적으로 치열하게 성찰했다. 저명한 문학평론가 김현(1942∼1990)은 "뿌리 뽑힌 인간이라는 주제를 보편적 인간 조건으로 확대시킨 전후 최대의 작가"라고 평하기도 했다.

전망이 닫힌 시대의 존재론적 고뇌를 그린 '회색인'(1963),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면서 파격적 서사 실험을 보인 '서유기'(1966), 신식민지적 현실의 위기의식을 풍자소설 기법으로 표현한 '총독의 소리'(1967~1968) 연작, 20세기 자체를 전면적으로 문제 삼으며 동시대인의 운명을 조망한 대작 '화두'(1994)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밖에도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태풍', '크리스마스 캐럴/가면고', '하늘의 다리/두만강', '우상의 집' 등 소설과 희곡집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 산문집 '유토피아의 꿈', '문학과 이데올로기', '길에 관한 명상' 등을 냈다.

2003년 계간지에 발표한 단편 '바다의 편지'를 끝으로 새 작품을 내지 않았다. 그는 2008년 신판 '최인훈 전집' 발간을 기념한 기자간담회에서 "한 권 분량의 새 작품집을 낼 만한 원고를 갖고 있다"고 밝혔다. 또 이듬해 자신의 희곡이 올려진 무대에서 관객들과 만나 "창작하는 사람들에게 은퇴란 없다. 지금도 여전히 글을 쓰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고인의 이름은 해외에도 알려져 '광장'이 영어·일본어·프랑스어·독일어·러시아어·중국어 등으로, '회색인'과 '옛날옛적에 훠어이 훠이'이 영어와 러시아어로 번역 출간됐다.

동인문학상(1966), 한국연극영화예술상 희곡상(1977), 중앙문화대상 예술 부문 장려상(1978), 서울극평가그룹상(1979), 이산문학상(1994), 박경리문학상(2011), 보관문화훈장(1999)을 받았다.

 
최인훈 작가가 지난해 2월 24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문화관에서 열린 법과대학 및 법학대학원 학위수여식에서 명예졸업증서를 받는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1977년부터 2001년 5월까지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많은 문인 제자를 배출했으며 퇴임 이후에도 명예교수로 예우받았다.

대학에서 오랫동안 교편을 잡았음에도 정작 본인은 대학 졸업장을 받지 못한 데 대해 "열악한 환경에서도 최상의 혜택을 줬는데도 누리지 못한 그때의 내가 너무 밉다.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크다"고 깊은 회한을 표현하기도 했다. 이 얘기를 들은 서울대는 지난해 2월 그에게 명예 졸업장을 수여했다.

그는 지난 3월 말 갑작스럽게 대장암 말기로 진단받고 투병을 시작했는데, 병상에서도 제자들과 평론가들을 격려하고 작품을 다듬는 모습을 보였다고 유족은 전한다. 또 근래 남북 해빙무드에 큰 관심을 두며 "통일보다 재통일이 더 위대하다. 처음부터 통일되어 있어 끄떡없는 것보다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했다가 여태까지의 흐름을 거슬러서, 그렇게 다시 한국이 통일된다면 참 위대한 일이다. 마치 삼단뛰기라는 운동의 원칙처럼, 한 번, 두 번, 세 번, 같은 뜀박질이라도 세번째 한 것이 더 위대하다. 그것이 변증법이라는 말의 진정한 가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유족으로는 부인 원영희 여사와 아들 윤구, 딸 윤경 씨가 있다.

장례는 '문학인장'으로 치러지며, 위원장은 문학과지성사 공동창립자이자 원로 문학평론가인 김병익이 맡았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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