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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박희천 (12) 비행기 삯 없어 한 달간 배 타고 태평양 건너 유학길
박희천(오른쪽 여섯 번째) 목사가 1962년 인천항에서 미국 로스엔젤레스행 배를 타기 전 환송하러 나온 이들과 함께했다. 유학을 하려면 대학 졸업과 어학 준비를 동시에 해야 했다. 하지만 부산 삼일교회에서는 영어를 공부할 방도가 없었다. 서울로 가기로 결심했다. 이때 내겐 식구도 있었다. 1957년 고향이 같은 차진실 자매와 결혼했다. 한상동 목사님이 서울에서 사역할 곳을 알아봐 주셨다. 숭실대 영문과에 편입해 61년 3월 졸업했다. 이듬해 4월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입학시험을 쳤다. 내 경제 사정에 비행기는 꿈도 꿀 수 없었다. 당시 주한 미군의 모든 수송...
입력:2022-08-15 14:10:01
[역경의 열매] 박희천 (11) 존경하던 한상동 목사님 곁에서 목회의 진면목 익혀
박희천 목사가 전도사로 사역하던 1956 12월 23일 삼일교회 학생신앙운동(SFC) 성탄축하 음악예배. 박 목사는 담임 한상동 목사로부터 목회 정신을 배웠다. 1950년대 고려신학교에서 1년에 한 번 정도 한상동 목사님이 단에 오르셨다. 56년 2월 ‘참되게 살자’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실 때였다. “하나님은 참되시기에 참된 자를 들어 쓰시니 참되게 살아야 한다”고 하셨다. 한 목사님은 일제강점기 때 신사참배 거부로 6년간 옥고를 치르신 분이었다. 평소 참되고 정직한 목사님의 삶을 아는 학생들이 큰 은혜를 받았다. 학생들 120명이 다 울었...
입력:2022-08-14 14:05:01
[역경의 열매] 박희천 (10) 주일학교 선생 시절 내 재간만 믿고 우쭐대다 학생수 줄어
1952년 7월 고신 전국 중·고등·대학생 연합수련회 참석자들. 일부 학생들은 박희천 목사가 맡고 있는 부산남교회 주일학교를 견학하러 왔다. 비록 1년 반을 제대로 먹지 못했으나 다니엘서 1장 15절 말씀처럼 하나님이 내게 건강을 주셔서 별 탈 없이 지냈다. 1년 반이 지나자 부산남교회에서 제과점 집사님 댁에 쌀을 지급했다. 그 집사님이 점심 도시락을 싸주면서 비로소 허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때 왜 그렇게 굶고 살아야 했을까 의문이 들곤 했는데 나중에 신학교 강단에 섰을 때 그 이유를 깨달았다. 내가 부산남교회같이 큰 교회에서 ...
입력:2022-08-11 14:05:01
[역경의 열매] 박희천 (9) 신학공부 갈증 풀었지만 전도사 사례비 못 받아 눈칫밥
박희천 목사가 편입한 1952년 당시 고려신학교 교수진. 어려울 때마다 금식기도나 철야기도를 했던 내게 풍금을 위한 기도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주변에서는 “기도한다고 풍금이 생기냐”며 웃었다. 그런데 서부교회 성도가 어느 집에 놀러가서 내 얘기를 했다고 한다. “스물다섯 된 우리 교회 전도사가 풍금 생기게 해 달라고 철야 기도를 하고 있다”고. 그 자리에 있던 어떤 부인이 선뜻 풍금을 사주겠다고 약속했고 그 다음 주 교회로 풍금이 배달됐다. 서부교회에서 사역하면서도 마음은 온통 신학 공부에 가 있었다. 평양에서 제대...
입력:2022-08-10 14:05:01
[역경의 열매] 박희천 (8) “죽든 살든 데리고 가자”… 국군 전세 밀려 대구로 피란
1951년 대구 대영의원 주변. 박희천 목사는 영락교회에서 만난 고향 소년 2명을 데리고 대구로 피난한다. 영락교회에서 사흘간 지내다 고향 사인장에서 온 사람을 만났다. 해방 직후 이남해 서울 중구 필동에 집을 마련해 잘 살고 있었다. 그 집에서 지내며 피난길의 피곤을 풀었다. 매일 영락교회로 가 건물에 잔뜩 붙어 있는 벽보를 읽었다. 하차리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할 때 주일학교를 다닌 학생 2명이 부모형제를 찾는다는 내용이 눈에 띄었다. 내게 그 아이들까지 돌볼 여유는 없었다. 하지만 내가 그 아이들을 모른 체하면 서울까지 무사히 오게 해주신 하나...
입력:2022-08-09 14:05:01
[역경의 열매] 박희천 (7) 중공군 공세로 피란… 서울 가는 마지막 열차에 올라
1950년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 중구 저동 일대와 영락교회. 박희천 목사가 1950년 12월 서울로 피난해 처음 찾아간 곳은 영락교회였다. 가족과 헤어진 후 평양으로 향했다. 국군이 평양을 거점 삼아 다시 북쪽으로 밀고 올라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평양으로 가는 길에 만난 사람들은 다 서해안 진남포로 가는 중이라고 했다. 왜 진남포로 가냐고 했더니 실망스러운 답변이 돌아왔다. “대동강 건너 선교리에 이미 중공군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평양으론 못 갑니다. 피할 곳은 진남포밖에 없어요.” 별수 없이 진남포로 향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 걷기...
입력:2022-08-08 14:10:01
[역경의 열매] 박희천 (6) “하나님이 날 살려주시는구나”… 성경 덕분에 목숨 건져
국군이 1950년 10월 평양 수복 직전 대동강을 건너는 모습. 박희천 목사는 국군이 평양을 수복할 때까지 석 달가량 산에 숨어 지냈다. 군사증을 받지 않고 있다 체포될 바엔 집을 떠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에 가서 금식하며 성경을 읽으면 최소 40일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수님도 40일 금식을 하지 않았는가. 1950년 8월 6일 새벽 4시에 집을 나섰다. 쌀과 콩 한 말을 자루에 넣어 등에 졌다. 성경과 영어 교과서는 습기가 배지 않도록 기름종이로 말아 보자기에 따로 쌌다. 쌀을 지고 대문까지 나갔을 때 뭔가 허전했다. 성경을 넣은 보따리를 ...
입력:2022-08-07 14:10:01
[역경의 열매] 박희천 (5) 기독교연맹 가입 거부… 빌립보서와 찬송가 40곡 암송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성구가 담긴 빌립보서. 어용 기독교연맹 가입을 거부했던 박희천 목사는 1950년 감옥에 갈 각오로 빌립보서 전체를 암송했다. 공산정권은 연맹에 가입하지 않으면 잡아가겠다고 계속 압력을 가했다. 상황이 점점 어려워졌지만 나는 다짐했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람을 받드는 조직에 가입할 수 없다.’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결국 나 자신과 한 약속을 지켰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을 수 있었다. 돌아보면 북한에서 세 가지를 하지 않은 것이 참 다행스럽다. 기독교연맹 가입, 공산당이 설립한 신학...
입력:2022-08-04 14:05:01
[역경의 열매] 박희천 (4) 공산당국에 넘어간 평양신학교… 기독교 핍박에 폐쇄
박희천 목사가 1948년 입학했던 평양신학교 건물. 공산정권이 이 건물을 빼앗아가면서 박 목사를 포함한 신학생들은 인근 교회로 옮겨 공부했다. 식산은행에 대한 미련은 차츰 떨쳐냈지만 대학에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성경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 역시 불같이 일었다. 성경을 아는 지름길은 목사가 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명감보다 성경을 알고 싶은 마음으로 목사가 되는 것을 고려했다. 1948년 9월 평양신학교에 합격했다. 그런데 등록금이 없었다. 그때 처음으로 3일간 금식기도를 했다. 그러자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 등록금을 주겠다는 연락이 왔다. ...
입력:2022-08-03 14:10:01
[역경의 열매] 박희천 (3) 주일성수 하려 보충수업 빠져… 오지마을로 좌천
1946년 6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노동 법령 실시를 축하하는 행렬. 박희천 목사는 소련군정이 실시 된 이후 은행에서 파면됐다. 뉴시스 내가 취직한 사인금융조합은 요즘으로 치자면 농협과 비슷한 곳이다. 면 소재지 금융조합이었지만 상당히 출세한 축이었다. 나는 이 조합에서 심상소학교 1년 선배인 신복윤 형님과 함께 근무했다. 상업학교에 다니는 동안 교회에 안 나가고 있었는데 이 형님이 내게 계속 말했다. “주일에는 교회에 가야지!” 결국 그 형님 채근에 다시 교회에 나가게 됐다. 상업학교를 졸업해 직장을 얻은 데다 교회까지 다시 다니게 돼 ...
입력:2022-08-02 14:10:01
[역경의 열매] 박희천 (2) 평양공립상업학교에 진학… 학교 첫 시험서 2등
박희천 목사가 1962년 미국 유학을 떠나기 전 차진실 사모, 세 자녀와 함께했다. 박 목사는 차 사모와 동향이다. 1941년 나는 평양공립상업학교에 입학했다. 그땐 문과나 이과, 상고나 농고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었다. 일반인들은 그냥 통칭해 상급학교란 의미로 ‘웃학교’라고 불렀다. 소학교 졸업 후 중등학교에 진학하는 학생은 면 소재지 전체에 겨우 서너 명에 불과했다. 여학생은 한 명이 될까 말까 할 정도로 진학률이 낮았다.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갈 때면 중등학교에 못 간 아이들이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차이나 카라로 된 검정색 교복만 ...
입력:2022-08-01 14:05:02
[역경의 열매] 박희천 (1) 내 삶의 지침 된 어머니의 훈육과 기독교 신앙
박희천 목사가 책을 읽는 모습. 그는 31일 “지금도 고저(그저) 매일 일어나 하루 종일 성경을 읽습네다”라고 했다. 국제제자훈련원 제공 나는 지금도 매일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일로 하루를 보낸다. 간혹 후배 목사들이 나를 찾아와 감사하다. 살아온 긴 세월을 돌아보면 다 하나님의 은혜다. 나는 1927년 평양에서 50리 정도 떨어진 평남 대동 김제면 외제리에서 태어났다. 당시 면 소재지마다 교회가 한두 군데씩은 있었다. 어머니는 5남 1녀 중 막내였던 나를 각별히 사랑했다. 어머니는 가족 중 유일하게 나를 교회에 데려다 줬다. 어머니는 “...
입력:2022-07-31 14:05:01
[역경의 열매] 이종삼 (25·끝) “주님, 지재유경이 이끄신 삶, 동과가 되겠나이다”
이종삼 목사가 최근 역경의열매 인터뷰를 위해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를 방문해 기도하고 있다. 겨울 들판은 쓸쓸하다. 하지만 바람 소리만 가득한 언 땅이 때때로 훈훈해질 때가 있다. 가지 끝에 달린 과일을 볼 때가 그렇다. 가을걷이 때 누군가 남겨둔 과일이 찬 겨울을 풍요롭게 만든다. 이렇게 남은 ‘동과(冬果)’를 보며 ‘나누는 삶의 의미’를 헤아려 본다. 동과는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생명수와도 같다. 빈 들판, 먹을 만한 과일이나 씨앗이 사라진 자리를 묵묵히 지키며 굶주린 새들에게, 작은 들짐승에게 자신을 내어 주는 동과야...
입력:2022-07-28 14:10:01
[역경의 열매] 이종삼 (24) 뼈를 깎는 노력으로 재정지원제한대학 오명 씻어
부산장신대가 교육부에 제출한 4만 쪽 분량의 보완 평가 자료 모습. 나와 허원구 총장은 대학의 먼 미래를 논할 여유가 없었다. 당장 대학 평가에서 낙제점 받은 걸 회복해야 했다. 우리 둘뿐 아니라 교수와 직원, 학생들까지 마음을 모았다. 교육부 보완 평가를 위해 준비한 서류만 4만 쪽에 달했다. 허 총장도 평가 당일 2분 스피치를 위해 한 달이 넘도록 준비했다. 대학은 수요자 중심의 교육시스템 확립을 시작으로 교육 품질 제고, 학생 역량 강화를 비롯해 취업률을 높이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사회복지학과를 폐과하는 아픔도 겪었다. 뼈를 ...
입력:2022-07-27 14:05:01
[역경의 열매] 이종삼 (23) 침몰 직전인 모교 부산장신대… 대학 정상화에 총력
경남 김해에 있는 부산장신대 정문에서 바라본 캠퍼스 모습. 2018년 8월 23일 교육부와 한국교육개발원이 ‘2018년 대학 기본역량 진단’ 결과를 발표했다. 교육부 등은 전국 대학을 ‘자율개선대학’ ‘역량강화대학’ ‘재정지원제한대학’ 3단계로 분류했다. 당시 모교인 부산장신대가 가장 낮은 단계인 재정지원제한대학에 속했다. 이 결과 3년간 교육부 일반재정지원에서 제외되는 직격탄을 맞았다. 2019년 신입생부터 국가장학금과 학자금 대출을 받지 못하는 지경에 놓였다. 공교롭게도 이 발표가 있기 하루 ...
입력:2022-07-26 14:05:01
[역경의 열매] 이종삼 (22) “선교사님, 우리 갈릴리교회가 다리를 놓겠습니다”
거제 갈릴리교회가 2019년 아프리카 에스와티니의 한 마을에 세운 ‘갈릴리 다리’ 전경. 아래 작은 사진은 다리 입구에 게시된 안내판 모습. 에스와티니는 아프리카 대륙의 남동부,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붙어 있는 나라로 영국 보호령을 거쳐 1968년 독립했다. 남한 면적의 6분의 1 수준의 작은 내륙국으로, 높은 산악 지대가 병풍처럼 국토를 둘러싼 풍경이 아름다워 ‘아프리카의 스위스’라는 별명을 지녔다. 나는 몇 해 전 아프리카 선교를 많이 하는 마카누리선교회 회원들과 이 나라를 방문했다. 박재춘 선교사의 사역지를 둘러보기 위해서...
입력:2022-07-25 14:05:01
[역경의 열매] 이종삼 (21) 인도 푸네 아가페신학교 설립… 복음의 일꾼 양성
거제 갈릴리교회가 인도 지도자 양성을 위해 지원하는 인도 푸네 아가페신학교 본관 모습. ‘푸네’는 인도 서부 마하라슈트라주(州)의 도시로 156만7000여명이 산다. 목화와 카펫을 비롯해 식료품 화학 농기구 유리 제지 공업이 발달했으며 동시에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갈릴리교회는 이곳에 세운 신학교를 전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인도 교육부의 인가를 받은 학교 법인까지 설립하면서 복음의 일꾼을 양성하고 있다. 이렇게 되기까지 오랜 역사가 있다. 20대 때 신학교에서 만난 형님인 김봉수 목사가 미국 플로리다에 아가...
입력:2022-07-24 14:05:01
[역경의 열매] 이종삼 (20) 신학교서 쌓은 우정… ‘동사 목회’하며 노후를 함께
1975년 신학교에 함께 입학했던 ‘친구 목사들’이 지난 20일 경남 거제 갈릴리교회 마당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정화종 정정호 이종삼 김장수 여두기 목사(왼쪽부터). 나는 1982년 장로회신학대 목회연구과정에 들어가기 7년 전인 1975년 부산 좌천동에 있던 영남신학교 부산신학사에 입학했다. 부산장신대의 전신인 이 신학교에서 신학도로서의 성품을 길렀고 목회자가 되는데 필요한 공부를 했다. 신학교 생활은 즐거웠다. 신학교에 오기 전 담임목사님이 계시지 않던 고향의 덕포교회에서 외롭게 신앙 생활하던 나는 매일 열리는 경건회와 기도...
입력:2022-07-21 14:05:01
[역경의 열매] 이종삼 (19) ‘걸어온 길 100년, 걸어갈 길 100년’ 담은 기념관 완공
예장통합 관계자들이 2018년 7월 30일 서울 종로구 총회창립100주년기념관 앞에서 테이프를 자르고 있다. 2018년에는 큰 위기가 있었다. 공사가 지연되면서 공사비가 계속 올라갔다. 건축위원회의 고민이 날로 커졌다. 2017년 말 기준으로 전국 노회에서 5억2300만원, 467개 교회가 9억6200만원을 보내 주셨다. 완공까지 필요한 공사비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건축위원회 회의에서 발언권을 얻었다. “총회 산하 기관과 단체, 노회 사무실을 유치합시더. 그분들은 새 건물을 사용해서 좋고 우리는 임대 보증금으로 모자란 건축비를 낼 수 있습니더. 그리고 그때...
입력:2022-07-20 14:05:01
[역경의 열매] 이종삼 (18) ‘총회창립100주년기념관’ 건축… 계획 차질 우왕좌왕
예장통합 ‘총회창립100주년기념관’ 공사가 한창 진행되는 모습. 2009년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 제94회 정기총회에서 ‘총회창립100주년기념관’을 짓자는 의견이 모아지면서 건축위원회까지 조직했다. 100회 총회는 2015년이었는데 100주년 기념관을 지어 새로운 100년의 청사진을 그리자는 뜻이 모아졌다. 좋은 뜻에도 불구하고 사업 진행은 지지부진했다. 서울 명성교회가 총회 맞은편, 현재 주차장으로 사용하는 부지를 기증하면서 건축 여론이 급물살을 타기도 했지만, 그 땅은 총회 본부를 모두 이전할 건물을 짓기엔 조금 좁았...
입력:2022-07-19 14:10:01
[역경의 열매] 이종삼 (17) “거제서 안타깝게 세상 떠나는 이 없도록 하겠심더”
이순창 예장통합 부총회장이 지난 5월 24일 거제 맑은샘종합병원 심뇌혈관센터 기공예배에서 설교하고 있다. 오른쪽이 이종삼 목사. 2013년 맑은샘병원을 개원한 뒤 모든 병상이 빠르게 찼다. 너무 많은 환자가 몰렸다.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더 크게 지었어야 했나 생각이 들기도 했다. 주변에서도 증축하자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전체 병원 규모를 키우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규모를 대폭 키우고 싶은 진료과가 있었다. 바로 ‘심뇌혈관센터’였다. 심뇌혈관센터는 심근경색 등 심혈관질환과 심장정지, 뇌졸중 등 ...
입력:2022-07-18 14:10:01
[역경의 열매] 이종삼 (16) “종합병원 세워 인술 베풀며 주님 사랑 전하고 싶어요”
이종삼(왼쪽 여섯 번째) 목사가 2013년 경남 거제 맑은샘병원 준공감사예배에서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요양병원을 설립한 뒤 양로원과 요양원, 요양병원으로 이어지는 노인 종합 복지 사역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거제에서 해야 할 일이 더 있었다. 종합병원이었다. 2010년 초였던 거로 기억한다. 지역에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거제시 연초면에 7명의 의사가 의기투합해 종합병원을 만들려다 무산된 부지가 있다는 얘기였다. 당장 길을 나섰다. 나지막한 언덕을 올라가니 건축이 중단된 부지가 보였다. 거제대로 옆에 있어 접근성이 좋았다. 건설 현장에서 돌...
입력:2022-07-17 14:05:01
[역경의 열매] 이종삼 (15) 자립 복지 꿈꾸며 목공회사 설립… 판로 없어 망할 뻔
경상남도 고성에 있는 목공회사 ‘요셉’ 전경. 훗날 회사 이름을 ‘JSF’로 바꿨다. 나는 복지 사업을 한다면서 여기저기에 도움을 구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립 복지를 꿈꾼 이유다. 이 연장 선상에서 목공회사를 설립하기로 마음먹고 경남 고성군의 깊은 산 중에 중소기업 대출 10억원을 받아 공장을 마련했다. 회사 이름은 ‘요셉’이었다. 가구를 만들어 대우조선이 만드는 대형 선박에 납품하는 게 목적이었다. 마침 친구가 실력 좋은 목수여서 제품에 대한 자신감도 웬만큼 있었다. 납품이 문제였다. 평소 알고 지...
입력:2022-07-14 14:05:01
[역경의 열매] 이종삼 (14) 혐오시설이라며 반대하던 면민들, 반색하며 “짝짝짝”
거제 정원노인요양원 어르신들이 최근 요양원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만약 대출을 받지 못했으면 요양병원은 부도를 피할 수 없었다. 요양병원이 부도로 넘어가면 기존에 운영하던 요양원과 양로원 모두 피해를 볼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대출의 길이 열리면서 결국 요양병원이 무사히 문을 열게 됐다. 사실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이 벌어진 셈이었다. 만약 서울 종로 예장통합 총회에서 열린 전국 노회장 모임에 가지 않았다면, 그리고 거기서 OO은행장을 소개해 준 고마운 장로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하면 지금도 오금이 저린다. 모...
입력:2022-07-13 14:05:01
[역경의 열매] 이종삼 (13) 280병상 규모 요양병원 건축… 대출 막혀 부도 위기
소나무 밭 둘레길로 둘러싸여 있는 경남 거제 굿뉴스요양병원 전경. 요양원을 세우고 나니 요양병원이 가까이 없다는 게 무척 아쉬웠다. 간단한 검진을 받으려 해도 30㎞ 떨어진 곳까지 가야 했다. 왕복 60㎞ 거리는 어르신들에게 큰 무리였다. 고심 끝에 요양병원을 세우기로 했다. 거제의 교회가 양로원과 요양원 세운 것도 벅찬데 요양병원이라니. 직원들까지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요양원과 요양병원이 함께 있어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요양병원은 요양원 옆 9917㎡(3000평) 넓이의 부지에 짓기로 했다. 연중 온화한 기후로 요양을 하기에는 최적의 장소...
입력:2022-07-12 1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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