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불가역적 폐기 확인시킨 후 美 상응조치 끌어내기

북한이 지난 5월 24일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에 앞서 3번 갱도 입구를 국내외 5개 언론에 공개하고 있는 모습. 당시 북한은 전문가 그룹의 참관과 검증을 허용하지 않았다. 사진공동취재단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7일 방북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에게 제안한 ‘풍계리 사찰’ 카드는 지난 5월 취한 폭파 조치가 불가역적임을 강조하는 의도로 풀이된다. 풍계리 핵실험장을 시작으로 동창리 미사일 엔진실험장, 영변 핵시설 순으로 폐기·사찰을 진행하면서 그에 대한 상응조치 논의를 본격화하겠다는 의미다. 비핵화 단계를 잘게 쪼개려는 북한의 입장이 상당부분 반영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풍계리 핵실험장은 북한이 2006년 10월 이후 총 6번의 핵실험을 했던 핵 개발의 핵심 장소다. 북한은 한·미·영·중·러 5개국 취재진이 참관한 가운데 핵실험장의 4개 갱도 중 3곳(1번 갱도는 이미 폐쇄)과 부대시설을 폭파했다. 첫 북·미 정상회담 전 미국에 비핵화의 진정성을 내보이고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제스처였다. 김 위원장은 지난 4월 ‘핵무력·경제 병진 노선’ 종료를 선언하면서 “이제는 우리에게 그 어떤 핵실험도 필요 없게 됐으며 북부 핵실험장도 자기의 사명을 끝마쳤다”고 했다.

북한이 풍계리 핵실험장을 폭파한 뒤에도 국제사회의 평가는 그리 후하지 않았다. 북한이 당초 약속한 전문가 참관이 이뤄지지 않아 필요하면 언제든 복구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북한이 5개월이 지나 사찰단을 초청한 건 ‘폭파 쇼’라는 비판을 수용했다는 의미가 있다.

정부는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사찰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여기서 쌓은 북·미 신뢰를 동력 삼아 비핵화 협상도 진전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북한이 9월 평양 남북 정상회담에서 밝힌 동창리 미사일 엔진실험장과 영변 핵시설 순으로 같은 절차를 밟으면 그에 맞춰 종전선언, 대북 제재 완화, 평화협정 체결 논의 등 상응조치가 이어지는 구상이다. 2차 북·미 정상회담 전 구체적인 비핵화 성과물을 원하는 미국 입장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풍계리 사찰은 과거에 취한 조치를 다시 확인하는 것이어서 진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평가도 있다. 김열수 한국군사문제연구원 안보전략실장은 8일 “이미 붕락시킨 핵실험장에 대한 사찰은 확인사살일 뿐”이라고 말했다. 김 실장은 “북한이 사찰단을 초청하긴 했지만 핵실험장의 어느 지점을 공개할지, 샘플 채취를 허용할지, 갱도 안을 확인할 수 있을지 아직 모른다”며 “북한은 플루토늄, 우라늄, 수소탄 실험까지 마쳤는데 사찰단이 들어가서 무엇을 더 알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다른 외교 소식통은 “북한은 그동안 엄격한 의미의 사찰을 허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사찰단 방북은 2차 북·미 정상회담 전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 폼페이오 장관이 이날 기자들에게 ‘사찰단이 풍계리와 미사일 엔진실험장을 방문하게 될 것’이라고 예고한 점에 비춰보면 북·미가 대략적인 일정은 잡은 것으로 보인다. 동창리 미사일 엔진실험장 해체는 김 위원장이 6·12 북·미 정상회담 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구두 약속한 사안이다.

폼페이오 장관의 방북 때 북·미가 핵 신고를 미루고 영변 핵시설 폐기와 종전선언부터 맞교환하는 ‘빅딜’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양측이 그 취지에는 공감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이런 중재안을 제시했던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외교부 청사에서 기자들과 만나 “미국이 융통성을 많이 갖고 준비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권지혜 기자 jh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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