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의·불신·파기 25년 풀지 못한 核퍼즐… 길이 보인다


 
영변 핵시설 위성사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8일 합의문에 서명할 것으로 예상된다. ‘북·미 정상 하노이 공동선언’ 정도로 불릴 새 합의문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약속하는 등 선언적 의미만 담았던 지난해 6월 1차 북·미 정상회담 공동성명보다 진전된 내용을 담을 것으로 보인다.

로버트 갈루치 미국 국무부 북핵 특사와 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의 1994년 제네바 합의 이후 양측은 25년간 많은 북핵 관련 합의를 도출해 왔다. 하지만 양측은 정치적 불신과 오해를 풀지 못해 매번 비슷한 내용의 약속을 맺고 깨기를 반복해 왔다.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하노이 선언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마중물이 돼줄지, 아니면 과거 합의들과 마찬가지로 이행이 미뤄지다 파기되는 전철을 반복할지에 한반도 미래가 달릴 것으로 전망된다.

북한과 미국은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이후 냉전 종식 때까지 40년 넘는 기간 동안 공개 대화를 한 적이 거의 없다. 북·미 대화가 활기를 띤 건 아이러니하게도 북핵 위기가 고조되면서다. 미국과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연일 북한 핵개발 의혹을 제기하자 북한은 93년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전격 선언한다. 그해 6월 강 제1부상과 아널드 캔터 당시 국무부 차관보가 뉴욕에서 만나 북한의 NPT 탈퇴 선언을 철회하는 내용의 공동선언을 채택한다. 북·미가 정치적 합의를 도출해낸 첫 사례였다.

하지만 뉴욕 선언 이후에도 영변 핵시설 사찰을 둘러싼 이견이 해소되지 않으면서 북핵 문제는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북한은 이듬해인 94년 영변 핵시설 내 원자로의 연료봉을 인출한 데 이어 IAEA 탈퇴까지 선언했다. 북한의 강경한 움직임에 미국은 대북 군사공격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일촉즉발로 치닫던 북핵 위기는 그해 10월 북·미 제네바 합의가 체결되면서 간신히 봉합됐다. 미국이 경수로와 중유를 지원하는 대가로 북한은 영변 핵시설을 동결키로 했다.

제네바 합의는 일부 잡음이 없지 않았지만 한동안 순조롭게 이행됐다. 특히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으로 남북 관계가 순풍을 맞자 북·미 관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같은 해 10월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은 워싱턴을 방문해 북·미 공동 코뮈니케를 채택했다. 북·미 양측은 신뢰 회복과 경제협력, 평양 북·미 정상회담 등을 약속했다. 직후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미 장관급 인사로는 처음으로 북한을 답방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북 강경책을 신봉하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북·미 관계는 다시 위기를 맞았다. 빌 클린턴 대통령의 평양 방문계획도 결국 무산됐다. 부시 대통령은 취임 직후 북한을 이란,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Axis of evil)’이라고 비난하며 자극했다. 이어 부시 행정부는 2002년 북한의 우라늄농축프로그램(UEP) 개발 의혹을 제기하면서 북한을 압박했다. 북한도 영변 핵시설 동결 해제, IAEA 사찰단 추방, NPT 탈퇴 선언으로 맞선 끝에 결국 2003년 제네바 합의가 파기되고 만다.

북한은 사태 해결을 위해 미국과의 직접 대화를 요구했다. 하지만 북·미가 마주앉는 모양새를 꺼린 부시 행정부는 북·미와 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가 참여하는 6자회담 테이블을 연다. 북한은 당초 6자회담에 참여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남한과 중국이 ‘6자회담 틀 안에서도 북·미 양자 대화가 가능하다’고 설득한 끝에 북한도 6자회담을 받아들였다.

6자회담은 2년 만인 2005년 북한의 모든 핵무기와 현존 핵개발 프로그램 폐기 약속을 골자로 하는 9·19 공동성명이라는 성과를 이뤄냈다. 하지만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 사태가 불거졌다. 미 재무부가 이 은행에 금융제재를 가하자 북한의 통치자금이 묶인 것이다. 북한은 이에 반발해 2006년 1차 핵실험을 감행한다. 우여곡절 끝에 6자회담 당사국은 2007년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2·13, 10·3 합의를 도출하지만 역시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6자회담은 2008년 12월을 끝으로 휴면 상태에 들어가고 만다. 북한은 이듬해인 2009년 2차 핵실험을 실시하면서 한반도 정세는 냉각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는 북한이 비핵화에 진정성을 보일 때까지 대화를 거부하는 ‘전략적 인내’를 대북정책으로 채택했다. 북·미는 2012년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우라늄 농축 중단을 골자로 하는 2·29 합의를 채택했으나 직후 북한이 ‘은하3호’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파기됐다.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는 이명박·박근혜정부의 대북 고립 정책과 맞물리면서 남북, 북·미 대화의 의미 있는 진전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전략적 인내 정책이 북한의 핵능력 고도화를 위한 시간만 벌어줬다는 비판이 나온다.

북·미 관계는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결정적 전환점을 맞는다. 트럼프 행정부는 2017년 북한의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등 도발이 이어지자 초강력 경제제재와 거친 언사로 맞대응했다. 때문에 북한과 미국이 전면전을 벌이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한때 팽배했다. 하지만 지난해 남북 정상회담 등 남북 관계가 개선되면서 북·미 직접 대화의 길이 함께 열렸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장관급 인사로는 18년 만에 평양을 방문하는 등 양측 간 접촉이 이어지던 끝에 역사적인 6·12 1차 북·미 정상회담이 성사됐다. 북·미 정상은 공동성명에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평화체제 수립, 북·미 관계 정상화를 약속했다. 내용만 놓고 보면 과거 북·미가 도출한 합의 내용과 큰 차이가 없다. 북·미 정상 간 첫 합의가 과거와 달리 실천에 옮겨질지 여부는 28일 판가름 날 전망이다.

하노이=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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