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과신’-김정은 ‘영변 과대평가’… 하노이 실패의 이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지난 1일 하노이 의회의사당에서 북측 인사와 이야기하고 있다. 김 제1부부장은 이날 김 위원장의 응우옌티낌응언 베트남 의회의장 면담 일정을 수행했다. AP뉴시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필리핀 기업인들과 이야기하면서 환하게 웃고 있다. 폼페이오 장관 왼쪽은 성 김 주필리핀 미국대사. AP뉴시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지나친 자신감과 판단 착오가 2차 북·미 정상회담 실패를 불러왔다는 분석이 잇달아 제기됐다. 정상회담이 열리기 전부터 이미 불길한 징후가 여럿 보였음에도 두 정상이 이를 무시하고 회담을 밀어붙인 결과라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만의 ‘협상의 기술’로 김 위원장의 핵 포기를 받아낼 것으로 믿었다. 김 위원장 역시 영변 핵시설 폐기 카드의 가치를 과대평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정상회담 첫날인 지난달 27일 베트남 하노이 소피텔 레전드 메트로폴 호텔에서 김 위원장과 만찬을 하며 ‘그랜드 바긴(일괄타결)’을 제안했다고 뉴욕타임스(NYT)가 2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북한이 핵무기와 핵물질, 핵시설을 포기하면 미국 주도의 대북 제재를 풀어준다는 내용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유능한 협상가로서 자신이 ‘통 큰 제안(a proposal to go big)’을 관철할 수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하지만 김 위원장은 이를 즉각 거절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런 판단을 한 배경에는 김 위원장과의 친분 관계에 대한 믿음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등 핵심 참모진은 트럼프 대통령의 일괄타결 아이디어가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조언했다. 백악관 참모들 사이에선 2차 북·미 정상회담 추진을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단계적 비핵화 접근법이 더욱 현실적이라는 전망도 나왔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의 친서를 보여주며 두 정상이 친밀한 관계임을 강조했다. 이 때문에 참모들 사이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김 위원장에게 속아넘어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기도 했다.

김 위원장에게도 과실이 있다. 영변 핵시설 폐기만 내놓으면 핵심 대북 제재 해제를 약속받고 돌아갈 수 있다는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영변 핵시설을 대가로 2016~2017년 도출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제재 결의 5건을 해제해 달라는 북측 제안은 실무협상 단계에서 제기됐다.

미국 측 실무진은 제재 해제가 실제로 이뤄지면 북한이 수십억 달러 규모의 이익을 볼 것으로 내다봤다. 낡은 영변 핵시설 폐기 카드를 받는 대신 북한에 내줄 카드로는 값어치가 너무 높았다. 미국 측이 영변 핵시설에 추가로 ‘플러스 알파’를 줄곧 요구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김 위원장은 실무협상 결과 보고를 받고도 트럼프 대통령과의 직접 담판에서 돌파구를 만들 수 있다고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북·미 협상에 정통한 소식통은 CNN방송에 “(김 위원장은) ‘플랜B’를 준비하지 않았다”면서 “그는 아주 자신 있게 하노이에 왔고 공동선언문에 서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고 말했다.

NYT에 따르면 북한 측 요구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주장한 사람은 폼페이오 장관이었다. 폼페이오 장관은 중앙정보국(CIA) 국장을 지내 북한 핵개발 프로그램에 정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폼페이오 장관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북한은 비밀 지하 핵시설을 여럿 운용하고 있다. 영변 핵시설만 합의하고 돌아가면 젊은 지도자에게 속았다는 혹평을 받는다”고 조언한 것으로 전해졌다. 당초 트럼프 대통령에게 북측 요구를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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