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완·박인하의 만화는 시대다] 민간의 구비전승 재해석… ‘한국형 판타지’로 초대형 히트

만화가 주호민의 장기로는 탁월한 캐릭터 조각 능력이 꼽힌다. 적재적소에 배치된 인물들이 독자에게 깊은 몰입감을 선사해서다. ‘신과 함께’ 시리즈는 특히 한국의 전통 서사를 개성 넘치는 캐릭터로 풀어내며 작품성과 흥행성을 동시에 거머쥔 수작이다. 필자 제공
 
‘짬’. 필자 제공
 
‘셋이서 쑥’. 필자 제공
 
‘빙탕후루’. 필자 제공





유튜브 크리에이터와 지상파 숏폼 예능 MC, 심지어 광고 모델로도 활동한다. 웹툰 작가라는 본업보다 과외활동이 더 활발해 보이기도 하는 주호민(39)이지만 여전히 주 1회 웹툰 ‘빙탕후루’를 연재 중이다. 그래도 주호민 하면 ‘파괴왕’ ‘파주스님’ ‘침착한 주말’과 같은 캐릭터가 떠오른다. 그는 끊임없이 자기를 캐릭터화한다.

주호민은 자신이 다녔던 대학의 학과, 아르바이트한 마트, 생활했던 군부대, 첫 연재 플랫폼 등이 사라졌다는 내용을 소개한 뒤 “후후. 이제 어디를 그만둬 볼까”라는 코멘트를 붙인다. 여러 사건에서 의미를 골라내고, 이 사건을 묶어 서사화하고, 이 서사를 기반으로 파괴왕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었다. 파괴왕은 대중문화콘텐츠에서 환영받는 ‘악당’처럼 보이지만, 주호민 입장에서 보면 황당하거나 씁쓸한 기억뿐이다. 이 지점에서 부조화의 감각이 발동하며 흥미를 유발한다. 파괴왕은 사라지지 않고 인터넷 소통의 하나인 ‘(애)드립’ 요소로도 사용된다. 파괴왕 캐릭터만 보더라도 주호민은 캐릭터화에 대한 감각이 뛰어나다. 바로 엔터테이너적 직감이다.

비애 속 즐거움을 찾는 눈

주호민은 2002년 입대 전 아마추어 인터넷 만화 사이트 ‘3류 만화 패밀리’를 통해 만화를 발표했다. 형식이나 서사 등 기존 만화에 적용된 엄격한 규칙을 해체하고 연습장에 연필이나 볼펜으로 그린, 주로 패러디 만화가 연재되던 게시판이었다. 2005년 그는 전역 후 군 생활을 그린 일상툰 ‘짬’을 ‘스투닷컴’에 연재하며 데뷔한다.

웹툰은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출판만화 형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유로운 방식으로 그림과 그림을 이어가며 정착된다. 작가 개인의 일상적인 이야기를 형식의 제약 없이 담아낸 일상툰(생활툰)으로 시작한 초기 웹툰은 강풀의 ‘순정만화’가 히트한 이후 세로 스크롤 형식을 활용한 서사 웹툰으로도 뻗어 나간다. 일상툰은 칸이나 말풍선 같은 형식에서 자유로웠다.

주호민은 하지만 특이하게 페이지를 규격화된 칸으로 나누는 전통적 방식을 택했다. 대신 1990년대 들어 세밀한 그림이 주류가 된 출판만화와 달리 최대한 작화 밀도를 낮추고, 캐릭터들을 기호화해 독자들이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런 스타일은 이후 주호민 만화에서 일관되게 유지된다. 웹툰 시대에 주호민 스타일이 힘을 발휘하는 이유다.

흔하디흔한 군대 이야기는 ‘짬’ 이전엔 주로 비일상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주호민은 ‘짬’에서 판타지가 뒤범벅된 군 무용담이 아닌 일상의 소박함을 담았다. 군대 이야기가 많은 사람의 공감을 받았던 것도 이 일상성 때문이었다. ‘짬’은 2006년 독자 투표로 독자만화대상에서 신인상을 받았으며, 2007년에는 ‘짬 시즌2’로 이어졌다.

2008년부터 그는 포털사이트 야후에서 ‘무한동력’을 연재했다. 후속작에서 바로 픽션으로 전환한 것인데, 당시 “88만원 세대”라 불린 20대의 일상을 담아낸 작품이었다.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한 당대 젊은이의 곤궁한 삶을 스물일곱 졸업반 대학생 장선재의 1인칭 시선으로 풀어냈다. 만화비평가 김낙호는 단행본 추천사에서 “갑갑한 무력감에 짓눌리는 모습을 잔인하게 해부하기보다, 그 속에서도 어떻게든 나름대로 삶의 소소한 즐거움을 찾아가며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손을 들어준다”고 평했다.

독자 대변하는 ‘아바타형 캐릭터’

2010년에는 네이버 웹툰에 ‘신과 함께’ 연재를 시작한다. ‘짬’과 ‘무한동력’은 작가 개인의 이야기였다. 반면 ‘신과 함께’는 저승사자, 이승과 같은 구비전승 서사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작품이었다. 서구 신화는 판타지 장르를 탄생시켰고, 일본도 수많은 신 이야기를 만화로 각색한다. 능력자가 나와 요괴를 퇴치하는 ‘퇴마장르’처럼 아예 장르 하나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구비전승을 재해석해 크게 성공한 만화를 찾기 어려웠다. ‘신과 함께’는 한국형 판타지 장르로 제일 크게 성공한 작품이다. ‘저승편’으로 시작해 ‘이승편’ ‘신화편’으로 이어지는 시리즈는 웹툰은 물론 영화로도 제작돼 성공을 거뒀다.

‘신과 함께’의 성공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밑바탕에는 주호민 만화 전반을 포괄하는 특징인 캐릭터화가 있다. 주호민은 한 인터뷰에서 “먼저 주인공과 조연급 캐릭터를 설정한 뒤 각 캐릭터가 누구를 대변하는지를 정한다. 주인공의 특징을 약하게 설정하는 편이다. 대신 조연급에 개성을 부여해 사건과 상황을 만든다. ‘매력 없는 주인공’이 가능한 이유는 내 작품이 캐릭터보다 서사에 방점을 찍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화자의 역할을 할 뿐이다. 그 외 캐릭터들은 미리 만들지 않는다. 급조해 등장시킨다. 미리 짜 놓으면 상상력에 한계가 생긴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조연급에 개성을 부여해 사건과 상황을 만든다’는 내용이다.

만화의 매력을 이야기할 때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이 잘 된다는 점을 꼽는다. 많은 서사물이 향유자를 이야기의 세계로 끌어들이기 위해 여러 장치를 마련해 놓는다. 그중 가장 강력한 장치가 보편성에서 비롯되는 감정이입이다. 독자들은 정의감 연민 가족애 같은 가치를 지닌 평범한 인물의 시선에 쉽게 의탁한다. 주호민이 설명한 ‘매력 없는 주인공’은 오스카 에이지가 ‘캐릭터 메이커’에서 설명한, 독자의 감정이입을 위해 제공된 ‘아바타형 캐릭터’인 셈이다.

‘신과 함께’의 주인공 김자홍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인물이다. 반면 지옥을 다스리는 염라대왕 변성대왕 태산대왕이나 강림도령 이덕춘 해원맥 같은 저승차사 등은 주인공과 달리 독특하고, 특징적이다. 처음부터 개성 강한 인물만 등장시켰다면 독자는 감정이입 없이 그저 황당한 이야기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독자의 아바타 김자홍이 있기에 주호민 월드는 비로소 살아 숨 쉬게 된다. 현실엔 없는 캐릭터들이지만, 주호민 세계에서는 모두가 생생하게 살아난다. 그는 이렇게 능숙한 캐릭터 배치로 서사를 풀어낸다. 그렇게 한국만화 역사에서 보기 드물게 한국 전통문화를 활용해 성공한 작품, ‘신과 함께’가 탄생했다.

주호민의 두 축, 일상툰과 판타지

‘신과 함께’ 이후 2013년 주호민은 다시 일상툰으로 돌아온다. ‘셋이서 쑥’이 그것이다. ‘짬’과 ‘무한동력’의 일상 서사는 30대 부부가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상을 그린 ‘셋이서 쑥’으로 이어졌다. 2015년 발표된 ‘만화전쟁’은 웹툰 작가의 일상에 황당한 상상을 결합한 경쾌한 중편 만화다. 만화가 진기한의 원고 ‘우주괴수 용지라’가 실수로 북한에 배포되고, 이 만화를 본 북한 주민들의 탈북이 이어지자 국정원 요원과 북한 안전보위부 요원이 남과 북의 입장에 맞춰 만화를 창작한다는 이야기다. 짬-무한동력-셋이서 쑥-만화전쟁, 이렇게 주호민의 일상툰 라인은 전개된다.

다른 축엔 판타지가 있다. 주호민은 2017년 네이버에 ‘빙탕후루’(원작 장희) 연재를 시작한다. 수많은 중국 신과 요괴들이 엮이는 ‘빙탕후루’는 ‘신과 함께’처럼 옛이야기의 원형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특유의 짧고 경쾌한 템포로 풀어낸 작품이다. 흔한 권선징악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한국사회를 비추기도 한다.

데뷔작인 ‘짬’ 이후 연재 중인 ‘빙탕후루’까지 주호민은 일상툰과 판타지 서사를 꾸준히 발표하고 있다. 주호민 월드에서 펼쳐지는 다채로운 캐릭터들의 흥미로운 서사는 글로벌한 인기를 끌고 있다. ‘신과 함께’가 2011년 일본에서 리메이크됐고, 이듬해에는 중국에, 2018년에는 대만에 소개됐다. ‘빙탕후루’도 2018년 중국에서 리메이크됐다. 미디어 믹스도 활발했는데, ‘신과 함께’는 드라마 뮤지컬 영화 게임 등은 물론 VR콘텐츠로도 제작됐다. 이렇게 다양한 매체를 넘나드는 힘은 바로 캐릭터에서 나온다. 만화가 주호민은 우리 시대의 탁월한 캐릭터 메이커이며, 이야기 메이커다.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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